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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 글 Mar 12. 2016

음악이 할 수 있는 일  (1)

 [글] 요시나가 미치코 吉永みち子 [번역] 소리와 글

일본을 대표하는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를 인터뷰한 글로 세 부분으로 나눠 담아 보았다. 부연 설명과 사진은 번역자가 덧붙였다. 사카모토의 말은 사각형으로 구분하였다




2010년 늦가을.

뉴욕, 보스턴, 로스앤젤레스 등 열 번째 유럽 투어를 막 마친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가 일본에 왔다.


11월 7일부터 12월 22일까지 열일곱 번의 재팬 투어는 앞서 발매된 앨범 「UTAU」를 토대로 35년 지기인 오누키 타에코大貫妙子와의 합동 콘서트.

사진 출처: http://www.commmons.com/alp/artists/oonuki_sakamoto/


발길을 옮긴 가나가와현 사가미 오노(相模大野) 홀은

사카모토를 기다리는 많은 팬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도

불가사의할 정도의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저마다의 생각을 가슴에 담고

지긋이 숨을 가누고 있는 듯한 분위기


이윽고 무대가 어두워지고

어둠 속에 융화된 검은 피아노가,

그리고 어느새 검정 옷을 입은 사카모토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건반의 첫소리가 울리고

연이어 물결같이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가누고 있었던 숨결들이 조금씩 섞여 나와


음악과 객석 간의 무수한 마음들이 서로 얽히며 차오르는 것 같았다 특히

그 해방감 속에 감성을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이번 투어는 피아노와 노래뿐. 그 이상 뺄 수 없는 심플 그 자체]라고 했던 사카모토의 말이 반짝하고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덧셈이 밖으로 밖으로 향하는 힘이라면

뺄셈은 안으로 안으로 향한다.


깎여질 대로 깎여지니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공간도 점점 넓어졌던 것이다.


그래도 무대와 객석의 거리를 벗어나 "세계의 사카모토"를 만나는 것은 긴장감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사카모토는 YMO(*Yellow Magic Orchestra의 약자, 사카모토는 1978年에 결성,1983年에 해산하기까지 약 5년간 활동했던 이 그룹의 멤버였다)의 강렬한 잔상과도 「이케나이 루주 매직」(듀엣으로 낸 앨범, 사진 오른쪽)의 인상과도


영화『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Lawrence)』의 요노이 대위와도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의 아마카스 대위와도


일본인 최초로 아카데미 작곡상(*1987년에 공개된 [마지막 황제] 영화음악으로 수상)을 받았을 때의 고양된 모습과도 달라서 새삼스럽게도 사카모토의 거대한 날개에 놀랐다.


날개를 접고 있는 사카모토 류이치는 조용하고 샤이한, 조금 낯가림이 있는 듯한 느낌


되살아난 콘서트 회장에서의 피아노 파동에 긴장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면서

역시 음악가 사카모토의 원점이기도 한, 피아노와의 만남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엄마가 고른 유치원이 *하니 모토코 씨의 교육이념에 공명한 자유 학원계 세타가야 유아생활단이었어요.

음악이나 그림에 열성적인 곳이라서 피아노 시간에는 꼭 피아노를  쳤죠.
그게 좋았는지도 즐거웠는지도 전혀 기억이 안 나요. 무엇을 쳤는지도 잊어버렸고요. 만 3살이었으니까 반항도 못했죠.

유치원에 들어간 첫날, 부모님은 문까지 같이 왔지만 그 안은 혼자 걸어가야 해서 무서워서 울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羽仁もと子, 일본 최초의 저널리스트이자 자유 학원의 창립자. 자유 학원은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가정을 중심으로 한 이상적인 교육을 추구했다)


어쩔 수 없이 문에서 유치원 안 까지 울면서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피아노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유아생활단이라는 게
간식인 과자도 장난감도
모두 엄마가 만들지 않으면 안 됐어요 만들기도 가까운 공장에서 나무 조각이라든가 못을 받아와서 배나 비행기를 만들고...
유리창에 그림을 그릴 때는 지금 내가 그리면 다음 해에 들어오는 아이가 그릴 곳이 없는 것 아닌가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명확한 이념이 강하게 흐르는 장소에서

막연한 고민과 반항심을 느끼면서도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유년기의 첫 마음의 주름(*상처)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유치원에 아이를 넣을 정도니까 엄마도 굉장히 강렬한 사람이었어요.
공립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는 남자는 모두 교복을 입었는데 나만 엄마가 직접 만든 재킷이었죠. 그것도 흰색. 나만 다른 게 싫었어요"


모자 디자이너였던

진보적이고 개성적인 엄마.


게다가 아버진 큐슈 남자(*한국이라면 경상도 남자)로 군대까지 다녀온 말 그대로 상남자였다.


카와데 출판사(河出書房)에서 미시마 유키오, 노마 히로시, 타카하시 카즈미, 오다 마코토 등의 저명한 작가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전설적인 편집자로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고

귀가는 항상 심야.


"한밤중에 술 취해서 돌아오는 아버지의 군가 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번쩍 눈이 떠졌어요. 목욕물은 받아 놓았는지 오챠즈케는 만들어 놓았는지 걱정이 되어서 엄마를 깨우러 가는 거죠
오챠즈케: 녹차를 우려낸 물에 밥을 말아 먹는 음식


준비해 놓지 않으면 난폭해지거나 싸움이 시작되었으니까.
집에서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어요. 대화도 [신문 가져와!] 같은 군대식이라서 나도 모르게 뛰어서 가져오곤 했죠.
제가 이렇게 소심해진 것도 부모탓이겠죠 지금도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게 특기니까"


자유주의인 엄마도 아버지에게는

반항하면서도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도 이성적으로는 진보적이었지만

생리적으로는 낡은 타입의 일본 남자였다.


양친의 굴절이 서로 얽혀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복잡하게

서로 부딪치는 가정에서


함께 지낼 형제도 없는 외동아들.


"가정이라는 게 사상 신조 같은 이성적인 부분보다도 그 인간의 생리가 그대로 나오는 곳이잖아요.
매일이 갈등의 연속이라서
아이였던 저는 가운데서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랐지요"


그런 집에 피아노가 있었다.

유치원 친구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계속한다는 바람에

엄마도 정서교육 면이라는 점에서  참가시켜 주었다.


그때 우릴 맡아줬던 선생님이 토쿠야마 토시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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