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라기 노리코의 詩

메마른 감성에 물 주기

by 소리와 글

이젠 한국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진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1926-2006)


처음 이바라기 노리코라는 시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일본어 공부를 막 시작한 무렵이었다


사전을 찾아가며

겨우 겨우 읽는 수준이었는데도

마냥 좋았었다


뭐가 좋았었냐고 묻는다면


심플하면서도 리드미컬한

말과 말의 조합들,

그 울림이 좋았다고

대답했을 지도 모른다.


십 수년이 흐른 지금.


지금도 여전히 이 시인이 좋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이다.




아마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그녀의 詩는 이것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바싹바싹 말라 가는 마음을
남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 물주는 것을 게을리해놓고서

나날이 까다로워져 가는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부드러움을 잃은 것은 어느 쪽인가

초조함이 더해가는 것을
근친(近親) 탓으로 돌리지 말라
무얼 하든 서툴기만 했던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초심이 사라져 가는 것을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초에 깨지기 쉬운 결심이 아니었던가

잘못된 일 일체를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간신히 빛나는 존엄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바보 같은 사람아

어려운 비유도 없는 심플한 문장인데도

자극적인 것은

그녀 특유의 직설적인 표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대표작은

바로 「내가 가장 예뻤을 때(わたしが一番きれいだったとき)」


조금만 부연설명을 하자면-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약학을 전공했던 그녀는 가장 예뻤을 십 대에 전쟁을 경험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19세.


전쟁 중에 체험한 굶주림과

공습에 대한 공포


그리고 전후의 혼란 속에서 느낀

무력감과 상실감이 이 詩에 오롯이 담겨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내려

말도 안 되는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 부리고 싶은 마음을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무디었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쳐흘렀다

애써 끊은 담배를 다시 피울 때처럼

어질 어질 이국의 음악을 탐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참으로 불행했고

나는 참으로 바보였고

나는 참으로 외로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되도록이면 오래 살기로


나이가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고

반복되는 구절에

정말

꽃다웠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지는 건 나뿐일까


그녀의 다른 詩에 있는
"아이들의 장난에도 상처받아

의지할 데 없는 생굴 같은 감수성"은


어쩌면 그녀의 작풍을

관통하는 키워드일지도 모른다


담담한 어조로 읊조리고 있지만

오롯이 생채기처럼 남아있는 기억들...

그럼에도 그것을

온화하게 빚어낼 수 있는 그녀의 감성이

나는 참 좋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