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니 가오리 비장의 작품집』중에서(매거진하우스 2004년)
내가 놀란 건
엄마 아빠가 이혼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혼하니 마니는
벌써 백 번도 넘게 나온 이야기.
그런 게 아니라 엄마가 내게 한 그 말, 엄마의 병이 거기까지 악화되었다는-에 놀랐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는 굉장히 흥분해 있었다.
"이혼하게 돼도 위자료 같은 건 필요 없다. 니가 알고 있다시피 난 좋은 아내가 아니었으니까."
어처구니없네,라고 나는 말했다.
"위자료도 없이 어떻게 살아가려고?"
도대체 70이 된 노부부가 이혼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자체가 보기 싫었다.
큭큭큭,이런 소리를 내며 엄마는 웃었다.
"그 사람이랑 살 거야."
"...... 그 사람?"
"요즘에 매일 밤 전화해 주는데, 나한테 엄청 잘한다."
그렇게 말하고는 엄마는 다시 한 번 큭큭큭,하고 웃었다.
"엄마? 진짜,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메마른 목소리로 엄마는 말했다.
커피를 내리면서 남편한테 이 얘길 하자
남편은 신문을 펼친 채로
"그 사람이라는 거 엘 씨 얘기야?"
하고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 진지해져서
"병원에 가는 게 좋을 지도."
라고 했다.
남편을 회사에
아들을 고등학교에 각각 보내고
뒷정리를 마치고 2층에 올라간 나는
책장에서 [가정의 의학]을 집어 들었다.
노인성 치매:뇌의 노년성 변화로 인해 노인에게 발병하는 일종의 정신병. 기억력이 감퇴하고 성격도 변화한다.
거기까지 읽고 책을 덮었다.
암담했다.
엄마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사랑한다.
팬이라든가 그루피*(인기 연예인을 열광적으로 따라다니는 여성팬. 빠순이보다 더 도가 지나친 광팬이란다)같이 단순하지 않다.
프레슬리는 그녀의 인생 자체다.
엄마의 방은
온통 프레슬리의 레코드 자켓으로 가득 메워져 있고
서랍이란 서랍에는 잡지를 잘라낸 것이나 프레슬리 관련 물건들로 점령되어 있다.
물론 밤낮없이 그 달달한 목소리는 집안 가득 흐르고 있고.
몇십 년을 줄곧 말이다.
대학 데뷔*(고교 졸업 후 새로운 대학생활에서 변신하려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라는 말이 있지만
엄마의 경우 그 전말이 심하다.
대부분의 병이 그렇듯 이런 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중증이 된다.
불쌍한 건 아빠였다.
하얀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 얌전한 현모양처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자기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한 것이다.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하고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댄스홀에 다니는 엄마를 보고
아빠는 분명 프레슬리를 원망했을 것이다.
엘 씨(우리들을 그를 이렇게 부른다)가 죽었던 그 날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