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리와 글 Apr 20. 2016

밤과 아내와 세제

『에쿠니 가오리 비장의 작품집』중에서(매거진하우스 2004년)


#읽기 전 유의사항

하나. 어디까지나 이 번역은 번역자의 취미생활의 일부로 스크랩은 허용하지 않아요.

둘. 괄호, 사진+α은 이해를 위해 번역자가 넣은 것으로 본문에는 없어요.

셋. "의역"한 부분이 많으므로 연구대상으로 할 경우 직접 본문을 참조해 주세요.



밤과 아내와 세제 夜と妻と洗剤



아내가 헤어지고 싶다고 했다.

우리 좀 이야기 하자, 고.


밤 10시가 넘은 시각.

난 피곤했다.



우리들은 결혼한 지 5년 째로 아이는 없다.



모르는 척 살 수는 있어,라고,

아내는 말했다.

근데 모르는 척 해도 있는 게 없어지진 않잖아,라고.


나는 아무 대꾸 없이 텔레비전을 봤다.

그러자 아내는 텔레비전을 꺼 버렸다.


뭐를 모르는 척하고 산다는 건지

뭐가 없어지는 게 아니란 건지


전혀 모르겠다.

늘 그렇듯이.



앞을 가로막고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아내의


매니큐어가 벗겨져 있는 발톱이 눈에 들어 왔다.


"아~리무버 말이야?!"

나는 말했다.


네일 리무버가 없어서

발톱에 남아있는 매니큐어를 지울 수 없구나.

그래서 이렇게 까칠까칠해져 있구나!


내 목소리에는 기대와 안도가 반반 섞여 있었다.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 네모나게 생긴 솜 말이구나. 티슈를 쓰라고 해도 당신이 절대 안 된다고 했던 그 솜이 없어진 거지?"


아내는 한숨을 쉬고,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야. 리무버도 화장솜도 있어. 발톱에 매니큐어가 벗겨져 있는 건 바빠서 손질할 시간이 없었을 뿐이야.



시간!

항복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고

아내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편의점에 팔지 않는 것을 내가 어쩌랴.


"내 말 좀 들어줘. 우리, 따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분명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나는 진절머리가 났다. 오늘 밤은 못 자겠구나.

"쓰레기봉투는 이제 얼마나 남았지?"


남편으로서 최선을 다하자고 결심했다.


아내의 가장 큰 특징은

질문에는 꼭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화가 나 있어도

울고 있어도

질문을 하면 꼬박꼬박 대답한다.


"세제는? 우유는? 다이어트 콜라는?"


나는 아내가 생활하는 데 있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쓰레기봉투는 많이 있어. 세제는 지금 사용할 정도밖에 없지만 우유도 다이어트 콜라도 있어. 근데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런 것들과 상관없어. 제발 부탁이니 진지하게 들어줘요."


나는 듣고 있지 않았다.

이미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하지 마,라느니

들어 줘,라느니


아내의 목소리를 등지고 나는 밖으로 나와 편의점으로 향했다.

집집 창문마다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세제는 핑크 병에 들어 있다.

핑크병은 몇 종류나 있지만 뚜껑도 핑크인 녀석이다.

나는 그것을 다섯 병 샀다.


다이어트 콜라도 우유도 샀다.

쓰레기봉투도 리무버도. 네모난 솜도.

사는 김에 주먹밥도.


짐은 꽤 무거웠다.


부스럭 부스럭 소리를 내는 하얀 비닐봉지가

도중에 찢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현관에 서 있는 아내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뭐하려고 또 이렇게나 많이."


양은 중요하다.


봉지 속에 든 것을 하나하나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서

아내는 한숨을 쉰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이지,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구나

다이어트 콜라는 있다고 얘기했잖아요. 우유도. 쓰레기봉투도.


그러고선 무심코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정말...사람 말할 땐 안 듣고."

손에 리무버를 들고 있다.



나의 승리다.




(初出 『주간신조(週刊新潮)』 2000년11월23일호)


매거진의 이전글 재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