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모범답안

여전히 아름다운 도시인 것을.

by 이피디


어느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





"여행에 모범답안은 없다.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들 조차

아낌없이 사랑하고

빈틈없이 어루만져 주는 것.

그저 이 도시, 이 거리, 이 사람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인정하는 것.

그게 전부일뿐이다."





프랑스에 도착한 첫날 저녁이었다.

파리에 입성했다는 기쁨도 잠시, 해가 저물기 무섭게 야속한 폭우가 가차 없이 쏟아져내렸다. 더군다나 그날은 유람선을 타고 센강의 눈부신 정취에 흠뻑 젖을 완벽한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정취에 젖기는커녕 호기롭게 걸쳐 입은 새로 산 트렌치코트만 완벽하게 젖어버렸다. 야심 차게 준비한 모든 계획이 무산된 건 물론이거니와, 여행 첫날 온갖 환상으로 가득했던 기대가 나의 심기와 함께 뒤틀려버린 순간이었다.


비에 젖어 무거워진 신발을 질척이며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모바일 지도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던 나는 신호등 앞에 다 달아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제야 빳빳해진 고개를 들고 가로등 불빛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로 시선을 옮겼다.


내 눈앞에 있던 비 젖은 파리의 거리는, 상한 내 마음이 무색하리만큼 영롱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축축한 공기, 빗방울 따라 흔들리는 시야가 어쩐 일인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곧, 이 긴 거리를 걸어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이곳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내가 원했던 여행의 모습이 아니면 틀린 것이라고 여긴 탓이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불규칙적인 빗소리와 하루 끝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 뒤엉키자, 이 꾸밈없고 솔직한 풍경으로부터 묘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이 기분 또한 예상치 못한 변수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때에서야 비로소, 난 이 도시 이 거리 이 사람들이 가진 가장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을 그 어떤 편견 없이 받아들일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아마 모범답안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들을 마주 할 용기가 부족했으리라. 날씨 앞에 소심한 겁쟁이, 예민 보스가 되기 일쑤이고 고심 끝에 세운 계획이 혹여 틀어지기라도 할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우기 십상이었다. 폭우가 쏟아져서 미리 예약해 둔 유람선이 취소되어도, 그래서 센강의 눈부신 정취에 젖지 못해도, 여전히 아름다운 도시인 것을 말이다. 비 오는 파리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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