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의 부탁으로 차로 3시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카페에 갔다. 네비가 인도하는 곳으로 열심히 따라가긴 했지만 계속 굽이진 산속으로만 인도하는 네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카페가 있다고?라는 말이 서너 번쯤 되풀이 되었을쯤에야 카페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다야..?"
카페라기 보단 조금 신경 써서 지어놓은 가정집에 가까웠다. '인스타에서 봤을 땐 진짜 예뻤어. 들어가 보자' 변명이라도 대듯 친구는 서둘러 대답했다. 의심의 눈초리로 친구를 바라보자 친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직접 쌓아 올린 것 같은 작은 돌계단을 올라가니 독채로 만들어진 작은 카페가 한눈에 들어왔다. 벽은 나무를 덧대어 만든 듯했고 높지 않은 처마 밑엔 문 종이 달려있었다. 종 밑으로 길게 늘어진 줄을 잡고 흔드니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머리칼을 스쳤고 코끝에선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뒤섞였다. 문 종의 소리가 골짜기 건너의 산에까지 울려 퍼지는 동안 시선은 울림을 따라 이동했다.
'이렇게 깊은 산속에 카페가 있다니'
왠지 모를 기대감이 차올랐다.
'드러오시오' 라는 글자가 삐뚤게 쓰여진 문을 여니 희미하게 공중을 떠돌던 음악소리가 선명해졌다. 이내 구수한 커피 향이 오감을 자극했다. 따스한 햇살이 창가 사이로 쏟아졌고 그 빛들은 금세 은은한 조명과 어우러졌다. 내 시선은 벽의 한 면을 빼곡히 채운 LP판에서 곳곳에 자리한 아담한 소품들, 그리고 노란색 군밤 모자를 쓴 주인에까지 이르렀다. 한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곳이었다. 테이블은 고작 두어 개가 전부였지만 구석구석 시선이 닿는 곳마다 주인의 애정이 고스란히 어려있었다. 바깥의 한 겨울 날씨는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 그곳은 안온하고 평화로웠다.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온돌로 만들어 놓은 긴 의자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감각적이고 독특한 소품이 처음부터 자기 자리였던 것처럼 배경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어떤 것들은 나무로 직접 만든 것 같기도 했다. 그중엔 형형색색의 팬들이 꽂혀져 있는 연필꽂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옆으로는 두꺼운 노트가 서너 권 놓여있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쉽게 볼만한 스프링 처리가 된 두꺼운 노트였다. 궁금함에 노트를 집어 들었다.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흔적이 묻어있는 방명록이었다.
첫 장을 넘기니 2015년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다른 시간 속에서 써 내려간 글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떤 이는 친구들과 모처럼의 여행을 즐기는 중이었고, 어떤 이들은 사귄 지 300일이 되는 날을 기념했다. 누구는 사업이 대박 나기를 바랐고, 또 다른 이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이름 모를 이가 남겨놓은 방명록을 읽는 일은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것처럼 배가 간질 했다. 숱한 다짐과 소망, 그리고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는 이들의 마음은 애틋함을 넘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숱한 삶의 단면들이 굽이치고 부딪히는 방명록을 보다가 내 가슴에 남은 누군가의 방명록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이가 남긴 흔적은 꺼내어 볼 때마다 입가에 웃음이 피어나는 예쁜 말들 뿐이었고, 어떤 이가 남긴 흔적은 얼른 다음장으로 넘기고 싶을 만큼 쓰리기도 했다. 분명 내 곁에 잠시 머물었지만 지금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조차 모르는 수많은 마음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의 시간은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더욱 먼 과거로 흘렀다.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을 것만 같은 희미한 그 어디 즈음 도달했을 때 나는 생각했다. 한 사람의 생이란 게 혹시 수많은 인생들이 만나는 지점을 모아놓은 방명록 같은 것은 아닐까. 숱한 감정들이 만나고 부딪히며 뒤섞이고 증발하여 남은 흔적. 내 삶은 아마 그런 흔적들이 모이고 쌓여 완성된, 아니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방명록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