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얼리는 정성
낮 기온이 벌써 30도라니. 작년 이맘때에도 여름 날씨였던가 기억을 더듬어 본다. 매년 겪는 일이지만 반소매를 입기 시작한 시점은 아리송하다. 5월이 이렇게 더우면 8월에는 어쩌란 말이냐는 심정으로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냈다. 실리콘 트레이에 단단히 자리 잡은 얼음은 빠져나올 생각을 안 한다. 하는 수 없이 실온에 잠시 내려놓고 원두를 갈았다. 커피 내릴 준비를 마칠 때쯤이면 실리콘 트레이에서 얼음이 순순히 빠져나온다.
유리잔에 얼기설기 쌓인 얼음의 틈 사이로 뜨거운 커피가 떨어진다. 보기 좋은 빛깔과 기분 좋은 커피 향, 그리고 때 이른 더위에 맞설 차가운 얼음까지 완벽하다. 커피를 마시며 설거지는 잠시 미뤄도 실리콘 트레이에 물을 채우는 일은 서두른다. 또 언제 시원한 게 당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식물에 물을 주는 기분으로 트레이의 홈에 물을 따랐다. 부피가 커질 것을 고려해 조금 여유를 준 다음 냉동실 펜트하우스에 트레이를 넣었다. 무색무취로 예쁘게 얼어붙기를 기대하면서.
냉동실에 가장 위층을 차지한 얼음 트레이는 꽝꽝 얼은 군만두와 아이스크림, 먹다 남긴 피자 조각보다 소중하다. 수평도 맞춰야 하고 음식 냄새로부터 지켜줘야 한다. 냉동실을 출입하는 다른 층의 음식물과 사물로부터 안전한 곳이 필요하다. 그곳이 바로 냉동실 펜트하우스다.
찰방거리는 실리콘 트레이를 극진히 펜트하우스로 에스코트한 뒤 남은 커피를 들이켰다. 한층 작고 매끄러워진 얼음 몇 알이 남아있다. 유리잔에 남아있는 얼음의 크기는 곧 더위와 갈증에 반비례한다. 조만간 명백한 여름이 찾아오면 얼음이 채 녹기도 전에 커피를 들이켤 게 분명하다. 펜트하우스에 출입할 일도 잦을 것이다. 유리잔에 남은 얼음을 싱크대에 붓고 테이블에 남은 물자국을 닦으며 지금 내 삶의 펜트하우스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