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늘 반반이다.
한 가지 일에도 다른 시선으로, 다른 마음으로 다가가게 된다.
30년 이상 같은 집에서 사는 남편도, 피붙이 자식도, 낳아 준 부모도, 아니 모든 관계에...
아이들이 나보다 어른 같을 때도 있어 입꼬리가 올라갈 때도 있지만, 겉모습만 한국인인 미국적인 아이들에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섭섭할 때도 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점점 ‘품 안에 자식’이란 말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많아진다. 내 새끼가 아니라 곧 남의 아들, 남의 딸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상상도 한다. 결혼도 아이도 다 늦은 터라 아직이지만 곧 시어머니, 장모라는 호칭이 나에게도 따라오리라.
나를 가장 많이 생각해 주며 조잘거리며 옆에 붙어있던 큰 아이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뉴욕에 가 있다. 갓 떠났을 땐 그래도 날마다 톡을 보내왔는데 점점 ‘무소식이 희소식’이 되어간다. 주말이 되어서야 딸아이는 안부를 묻는 톡을 보낸다. 물론 그것도 감사하지만. 너무 공부할 것이 많아 밥을 해 먹을 시간조차 없단다. 매 끼를 다 사 먹는 단다. 결국 나에게 남는 메시지는 뉴욕의 생활비가 너무 비싸 돈이 좀 모자랄 것 같다는 내용이다.
아들은 얼마 전 말했다. “이 주쯤 후에 전기차 테슬러가 우리 집에 도착한다”라고. 의논이 아니라 통보였다.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너저분한 우리 집 차고가 차곡차곡 정리가 되어 있어 깜짝 놀랐다. 넓은 빈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손을 대면 단번에 흔적을 알 수 있을 것 같이 반짝반짝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검은색 테슬러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좀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할 것 같아 정리를 해주다가 차 안을 들여다보니 차속 내부며, 액세서리와 깔판조차 다 새것으로 모두 멋져 보여 탐이 났다. 순간 "좋기는 좋네!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런데 왜 이 아이가 검은색으로 샀을까?" 한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홀로 서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나이 들어 자녀들에게 기대어 사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았다. 결혼 후에도 한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기대어 사는 울 엄마시대의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늘 홀로 서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지 몸과 마음이 가난해질 때가 있다. 내 새끼이지만 따로인 느낌이 들 때마다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남편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이제 우리만 잘 살면 되네”라고 힘없이 말한다. 그 순간은 내 옆에서 함께 늙어가는 사람은 결국 남편이지 한다. 그렇지만 역시 넘편인 남편은 자식들 앞에선 바로 돌변한다.
며칠 전 요즘 자주가게 되는 식당에서 남편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여러 가지 야채와 과일을 맘껏 먹을 수 있어 건강을 챙길 수 있고 커피까지 주는 식당, 너무도 가격이 좋아 집밥보다 더 싼 식당, 장소도 꽤 넓어 오래 앉아있어도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식당인 ‘골든코랄’에서였다. 시간이 되어 2층 방에서 녹음을 하다가 옷을 차려입고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는데 아들도 같이 간다고 남편은 좋아라 했다. 큰 아이가 뉴욕으로 떠나고 나도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어 좋았다. 그러나 왠지 그 식당은 다 큰 아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눈치 없는 아빠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아들의 고마운 마음도 전해 왔지만!
60이 넘은 우리 부부에게는 1석 3 조이상의 식당이지만 아들의 취향은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아들과 나는 짜고 기름진 음식이 대부분인 미국식당을 선호하지 않는다. 분명 아들은 우리보다 짠 것과 단 것에 손이 먼저 가는 남편을 걱정하는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직도 부모가 가자고 하면 따라나서 주는 나이 든 아들이고, 가족이 먼저라고 늘 말해주는 아들이지만, 역시 식사를 마치고 차에 앉아 한 마디 하셨다!
“이곳은 6년 만에 와도 그대로네요.”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자기 이야기를 주절주절 끄적이고 있는 것을 아는지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린다. 아들의 출근이 좀 늦은 날인가 보다. 곧바로 2층 나의 방에서 카톡으로 ‘좋은 하루가 돼라’는 이모콘을 보낸다. 그러면 ‘사랑한다’는 내용의 이모콘이 답으로 온다. 순간 나의 수상한 입꼬리가 올라간다.
가끔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잘 다녀오라고 얼굴을 보며 허그도 크게 하지만 날마다는 안 한다. 언제 짝꿍들을 만나 완전히 떠날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간섭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이들이 요리를 한 후 주변이 좀 더럽힌 상태로 있어도 잔소리하지 않는다. 구입한 재료 기한 날짜 전에 다 먹으라는 잔소리를 들어도 “알았습니다” 한다. (속으로 너는? 하면서도!) 되도록이면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려고 한다. 때론 좀 더 산 엄마가 보기에 분명 틀릴 때도 있지만 직접 경험하길 바라니까.
그런데 이제 더 이상은 나의 밀당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나의 밀당 같지 않은 밀당이 곧 막을 내린다. 12월쯤 아들도 집을 떠난다고 통보했다. 비즈니스 하는 곳 근처로 이사를 나간단다. 그런데 나는 우습게도 나의 마음을 최대한 들키지 않으려고 하면서 슬쩍 물어본다.
너의 운동기구들도 다 가져갈 거지?
코로나 후로 구입한 아들의 운동기구들은 사실 집 안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덤벨, 바벨, 트레이드 밀, 스텝퍼, 일립티컬, 실내자전거 등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집안이 너저분해 보였지만 그저 바라만 보았다. 가져갈 수 있는 것은 가져가고 가져갈 수 없는 것은 판단다. 속으로 "야호!"를 외쳤다. 우리도 이제 좀 규모를 줄여 언제든 홀가분하게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늘 마음이 반반이다!!!
때론 자식이지만 섭섭하지 않게 하기 위해 눈치를 보고, 때론 함께 더 살아보려고 맞춰주기도 한다.
"그래! 이제 너희들도 독립할 때도 되었다. 너희들도 친구들처럼 나가서 잘 살아봐야지." 하며 쿨한 척도 하지만, "이제 나도 홀가분하게 살란다. 너네들 잔소리 안 듣고!"라며 마음속으로 웃는다.
가족이라도 어느 정도는 관계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더욱더 가까워진다는 내 멋대로의 이유를 내세운다.
아니,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