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취미, 낭독

스테파냐의 낭독 걷기 1

by 한희정

“취미가 뭐예요?”


누구나 쉽게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저에겐 늘 어려운 숙제였습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머뭇머뭇거렸습니다. 대답 대신 억지웃음으로 얼버무린 적도 많았죠. 어릴 적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제출해야 했던 ‘학생환경조사’의 취미란을 보며 빈칸을 채우지 못해 끙끙 앓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따라오는 이 질문은 늘 저를 불편하게 했죠. 그래서일까요, 전 먼저 누군가에게 “취미가 뭐예요?”라고 묻지 않게 되더라고요.


취미가 없는 것이 이렇게나 이상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망설임 없이 독서, 영화 감상, 요리, 운동, 그림 등을 술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까지 했죠. 저도 뭐라도 하나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내세울 취미가 없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저란 사람은 재미없는 사람, 심심하게 사는 사람으로 보였을 겁니다. 돌이켜보면 무언가를 즐길 만한 시간적 여유 없이, 또 마음의 여백도 없이 살아왔던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딱 한 가지, 좋아하는 것이 있기는 했습니다. 바로 피아노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피아노. 하지만 이 피아노는 저에게 ‘취미’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취미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입니다. '전문적인 활동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었습니다. 피아노는 피아니스트라는 꿈을 향해 저의 모든 마음과 시간을 쏟아부었던 ‘일’이었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시작한 피아노는 유학과 학위를 거치며 음악은 제 삶의 중심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5년 전, 전혀 예기지 못했던 위기를 만났습니다. 바로 코로나 19 팬데믹이었죠. 그때 모든 일상이 완전히 멈춰 버렸습니다.


처음 두 달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했습니다. 오랜 세월 쉼 없이 달려온 제게 주어진 긴 휴가 같았습니다. 늘 일정에 쫓겨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지난날이 아쉬웠는데, 코로나 덕분에 한 지붕 아래 다시 모일 수 있었습니다. 멀리 타주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두 아이가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반면 가사보다는 음악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었던 저는 코로나로 인해 새로운 일상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좋았지만, 저는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고, TV를 보든가, 집 안 곳곳을 정리하는 등, 그저 ‘집이라는 작은 세계 안’에서, 날마다 비슷한 하루를 살았습니다. 반강제적으로 한 공간 안에서 함께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가 이어지자 점점 가슴이 허전해지면서 텅 빈 껍데기만 남은 듯했습니다. 그 많던 학생들과도 연락이 끊기고, 교회 예배가 없어지니 30년 이상 섬기던 성가대 활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평생 쌓아 올린 커리어가, 바람에 쓸려간 사막의 발자국처럼 순식간에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연히 들어간 한 카카오톡 방에서 '낭독 기초반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홍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짧은 홍보 문구가 제 마음을 묘하게 끌어당겼습니다. 평소 묵독과 속독을 선호하며 낭독은 시간 낭비라 여기던 제가, 충동적으로 덜컥 수강 신청을 해버렸습니다.


그 후 12주 동안 온라인 줌 화면 속에서 11명의 수강생과 매주 만났습니다. 처음 몇 주는 나이도 많고 낯선 얼굴들의 시선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워, 제 차례가 다가올수록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대 위에서도 잘 떨지 않던 제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화면 속의 떨림은 이상하리만큼 싫지 않았습니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바다에 부드러운 잔물결이 이는 듯, 늘 똑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살아 숨 쉬는 듯한 설렘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한 주 한 주 지나가면서 ‘그냥’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고자 시작한 그 낭독으로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첫 녹음 목소리는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너무나 거칠고 지쳐있는 목소리가 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너, 많이 힘들어 보여. 괜찮아?”


그 순간 눈물이 주룩주룩 하염없이 흘러내렸죠.


낭독으로 내면에 숨어있는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낭독은 단순히 소리 내어 글을 읽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소음을 걷어내고 온전히 제 자신에게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를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5년 차에 접어든 낭독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제 ‘생애 첫 취미’입니다.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면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평생 음악이라는 한 길만 걸어온 제가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인 '낭독'의 기초를 배우겠다고 새벽 5시부터 앉아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저는 낭독의 길 위에 있습니다. 때로는 기어가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코로나 덕분에 저는 ‘일’이 아닌 ‘취미’를 만났고, 그 낭독이라는 취미로 제2의 인생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예전의 저처럼 취미 없이 살아가시는 분들께, 오로지 책과 나만이 존재하는 낭독의 시간을 조심스레 권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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