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8일 월요일

빛과 사랑 (로즈 핑크/ 핑크)

by Redsmup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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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note : 연민과 자기 수용. 자신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과정에서 연민이 더 많이 일어날수록 스스로를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Affirmation :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허용한다. 나는 내가 그냥 있을 수 있게 허용한다.


이십 대 중반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화장을 하나 안 하나 똑같은데 왜 화장을 해요?"


화장을 잘 못했다. 지금도 잘 못한다. 화장을 하는 기술이 영 늘지 않는다. 똥 손.

뒤늦게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 간호사로 취직하면서부터였다. 서툰 화장, 수간호사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그녀의 말이 아팠다. 화장을 좀 잘했으면 좋겠는데 수간호사의 태움에도 나의 화장은 늘지 않았다.


선배 간호사 중에 피부가 정말 우윳빛 같은 간호사가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빨간 립스틱만 바르고 일하는데도 너무 예쁜 간호사. 사람들은 그녀를 백설공주라고 불렀다. 그녀가 너무 부러웠다.

어쩜 저리도 예쁠까, 내 피부도 저랬으면!

아침에 일어나면 내 피부가 티 없이 맑은 우윳빛으로 변해있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상상이 진짜 현실이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화장을 안 해도 되는 건 예쁜 이들의 특권일까?

나도 그만큼 예쁘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움 속에서 나는 쪼그라들었다.


못하는 화장도 익숙해지면 화장기 없는 얼굴은 나만의 비밀이 된다. 그나마 서툰 화장으로 치장한 얼굴이 맨 얼굴보다 나아 보인다. 화장을 하고 밖에 나가면 화장이 지워질라 조심하게 된다. 화장이 조금이라도 지워진 것 같으면 얼른 화장을 고친다.

맨 얼굴이 드러날 뻔했잖아. 휴~


이십 대 중반, 누군가 나에게 했던 말, 화장을 하나 안 하나 똑같다는 말이 그땐 욕처럼 들렸다. 화장 참 못한다는 핀잔처럼 들렸다. 그런데 그 말은 어쩌면 화장을 안 해도 되는데 왜 그렇게 화장을 하고 나오느라 애쓰냐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 문득 그날의 그 말과 함께 떠오른 생각.


화장에 손을 대기 전, 나에겐 화장에 대한 강박이 없었다. 화장을 해야 한다는 개념조차 없었으니까.

대학교 3학년 때였을 거다. 병원 임상 실습을 나가던 어느 날 다른 병동으로 실습을 나갔다 돌아온 애에게 동기들이 몰려들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습 나간 병동의 수간호사가 다음부터 실습 나올 때는 반드시 화장을 하고 오라며 손수 화장을 해줬단다. 그 수간호사도 똥 손이었던 것 같다. 그 친구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변해있었다.

그때만 해도 수긍하는 마음보다 반항하고픈 마음이 더 컸다.

화장 좀 안 하면 어때서, 간호사에게 중요한 게 화장이야?


직장 생활에서 반항심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고달픔만 안겨줄 뿐. 그때부터 나는 화장을 안 해도 화장한 것처럼 예쁜 피부를 가진 이를 부러워했다. 화장 잘하는 금손이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내 화장이 엉망인 게 화장품 때문인 것 같아 좋은 화장품을 찾기 시작했다. 화장 안 한 나의 맨 얼굴을 점점 감추게 되었다.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는 미완성품처럼 여겨졌다. 어떨 땐 불량품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대로 내놓으면 안 돼. 여기만 좀 가리고, 여기도 가려야겠다.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여자들만 있는 모임에 갔었다. 마스크를 벗으니 모두 맨 얼굴이었다. 마스크로 가리고 다니니까 화장 안 한다고 뭐라 할 사람 없어서 좋다고 누군가 말했다. 왠지 서글펐다. 그동안 우리는 화장을 강요당하고 있었던 걸까? 어쩌다 여자들의 맨 얼굴이 터부가 되었을까? 누군가는 이제 남자들도 화장을 하는 시대가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건 성차별 문제는 아니지 않냐고 말이다. 모두가 화장을 하고 다니는 세상, 어쩌지? 이건 더 서글픈데. 나의 서글픔은 특정 성에 대한 차별이나 억압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어쩌다 내가 나의 맨얼굴을 창피하게 여기게 된 걸까, 그게 서글퍼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반발심이 들던 일이 어느새 나의 일상으로, 나의 당연함으로 녹아든 게 섬뜩한 것이었다.

"화장을 하나 안 하나 똑같은데 왜 화장을 해요?"

맞아.

화장을 하나 안 하나 나는 나인 걸.


나는 내가 그냥 있을 수 있게 허용한다.

쉬운 것 같지만 참 어려운 말,

맨 얼굴로 그냥 있는 것도 허용하기 힘든 내가 무엇인들 그냥 있을 수 있게 허용할 수 있을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텐데 이제는 노력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그냥 있을 수 있게 나를 내버려 두는 것.

지금 그걸 연습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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