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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홍 Jan 13. 2021

#5 그날의 돌담은 이렇게 말했다

#2, 5 10길 #7 18-19길 #17 19길 #21 7길



      제주에는 26개 코스(정규 21, 부속 5)로 구성된 425km의 올레길이 있다. 처음 공개된 2007년 이래 "길"은 꽤 오랜 시간 힐링 열풍을 일으켰다. 정신없는 일상에서 벗어난 조용한 올레(골목의 제주어)는 매력적인 쉼표였던 게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점차 시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일부 코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힐링과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올레길은 올레길이다. 사그라들지언정 꺼지진 않는다. 오랜 세월 제주가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길은 그 자리에서 나와 당신을 기다린다.






      첫 경험은 어리숙하지만 곧 환희와 놀라움이 뒤섞인 달뜸이다. 모두가 처음인 이곳에서, 믿을 것이라고는 휴대전화 지도 어플 하나다. 아주 못 쓰지는 않을 머리인지 슬슬 나뭇가지에 묶인 올레길 안내 띠가 눈에 익는다. 자연스레 지도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줄어들자 제법 모험가가 된 듯도 싶다. 길고 긴 걸음 동안 세 명의 올레꾼을 보았고, 이내 놓치길 반복이다. 전혀 알 길 없는 이들이지만, 예상치 못한 외진 길에서는 10년 지기 친구의 얼굴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들에게 내적 친밀감을 쌓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18번 길의 끝자락, 19번 길의 시작을 마무리하며 - 조천읍 <카페다>의 제주말차라떼(5,500)




       맞은편에서 불쑥, 누가 보아도 '나는 여행자이며, 6시간 이상을 걷고 있다'고 말하는 남성이 올레길을 걷는 중이냐며 말을 건넨다. 아, 말로만 듣던 낯선 여행지에서의 운명적 만남일까. 흰소리 같은 의식의 흐름에 헛웃음을 지으며 맞다고 대답한다. 다시 함덕해수욕장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묻는다. 무지렁이던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아는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검색하고 행여 길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던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된다. 웃음 가득한 대화를 나누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달뜬다.




7번 길 - 사유지를 돌아가는 돌담길. 먼 길 돌아 그 끝자락엔.



      뭣도 모르고 사랑을 시작한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만큼 행복했던 때가 없다. 어리지만 열정으로 충만했고 어설프지만 진심이었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로 인해 겪었던 것은 - 어찌 되었든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 - 딱 죽기 직전의 힘듦이었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달뜬 기분에 취한 망각의 반복이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꼭 알콜성 치매다. 숙취가 지독했다.



      문제는 늘 다음이다. 분명 진절머리 나게 싫지만, 어느 순간 또 마냥 싫지만은 않은 거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왜일까. 밤새 게워내며 다시 술을 마시면 사람이 아니라던 다짐을 뒤로, 불현듯 해장술이 생각나는 건 무엇 때문일까. 그때는 없고 지금은 있는 걸까. 혹은 그 반대일까.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나다. 주름 몇 개가 짙어졌을 뿐, 껍데기는 분명 나인데 속은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곰팡이 핀 귤이다. 남을 게 없대도, 이제 도려낼 각오가 생긴 걸까.



Tabula rāsa



      나는 흰 종이가 될 것이다. 내가 겪었던 모든 경험과 품었던 기억을 도려내고 나면, 나는 흰 종이Tabula rāsa다. 한 삶을 지우는 것임을 인정한다. 삶은 많은 것을 준다. 메르세데스 소사가 노래한 <Gracias a la Vida>의 노랫말처럼 높은 하늘의 빛나는 곳을 볼 수 있는 반짝이는 두 눈과, 낮과 밤, 전부를 들을 수 있는 청각을 준다. 그렇게 삶은 온 우주를 새긴다. 그리고 나는 우주를 지우는 기로에 서있다.



      길에서 나는, 삶을 그렸다. 길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나치고 그 끝에 사랑하는 존재를 마주하고 싶었다. 수많은 이들 속에 서 있는 당신을 구별해내고 싶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내가 결코 길을 잃은 것이 아님을 증명해주길 바랐다. 너무 늦지 않았다고, 너의 우주는 여기 있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당신이, 삶이길 바랐다.



      당신의 종이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을지 궁금하다. 처음 그 사람을 발견해낸 그 순간, 그 사람을 부르던 그 순간, 그리고 마음에 새겼던 그 순간이 쓰여 있는지 궁금하다.



      오늘 당신은, 당신 곁의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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