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

by 들숨

1.

보니 구름을 모으더라

그래 서둘러 씨앗을 뿌렸고 돌아보니

나무들 가지마다 꽃들이 가득하니 보기에 좋더라

기다림이 쌓여 굳은 화석은 그 속이 까맣다.

그 많던 꽃들이 다 지고 계절은 씨줄의 색깔을 바꾸느라 분주한데

씨앗에게 한 방울 소식 없어 안타까움에 투덜거리며 눈을 흘겨도

외면함인지 무심함인지 티 없이 맑은 얼굴에

구름 한 점 지나지 않는다. 서점에 가봐야겠다


하늘의 마음을 알려 준다는 책들이 온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난립이다 이들은 선택을 시험에 빠트리고 빛을 향해 웃자라다

가진 양분이 다하는 날 스스로 고사한다

다행히 기름진 곳에서 자라 잘 팔린다는 색깔 좋은 책을 한 곳에 모아 놓았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가죽 표지에 금장으로 치장을 한,

어젯밤 시험에 늦고 보기가 하나뿐인 객관식을 받았다 찜찜한 꿈이다

벽에 기대 육중한 가죽 표지를 열자

금빛 액자 속 근엄한 저자의 얼굴 아래 화려한 약력이 흘러내린다

인사말 등 여러 장을 건너뛰어 본문을 열자

세련된 글자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저자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글을 시작한다

자신의 책이 질과 내용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하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기에

이 책을 읽고 전적으로 믿으면

누구라도 싹을 틔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자

본론이 시작되기도 전에 술렁거리던 글자들이

저자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몰래 빠져나와 다음 장을 열어보니

누구나 알고 있고 다른 책에서도 이미 언급하고 있는

하늘의 지난 말과 그가 행한 일만 옮겨놓았을 뿐

왜 그랬고 무슨 심정으로 어떤 기대와 염려로 그랬는지가 빠져있다

마지막 장을 닫을 때까지 온통 저자의 마음뿐

하늘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밤 시험에 답은 없었고

분리수거 재활용 항목에 가죽은 빠져있다 번거로울 뻔했다


2.

포기했던 난립을 헤친다

이들에 가려지고 밀려나 척박한 구석에

두꺼운 먼지를 걸친 흐릿한 형체가 서있다

오래된 제목이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허름한 표지에 위태롭게 걸려있다 숨이 멎는다

조심스럽게 계산대에 올려놓자

점원이 하품을 했고, 하품의 무게만큼 책값을 지불했다

돌아와 입고 있던 먼지를 벗기고 햇빛과 바람을 소개하자 표지에 화색이 돈다

손끝에 떨림이 낡은 표지를 안심시킨다 표지가 열리고

그 흔한 약력 한 줄 들지 않은 저자 앞에 낡은 글자들이 띄엄띄엄 졸고 있다

나도 한 줄을 잡고 앉는다

졸고 있는 글자들의 등을 어루만지 저자가 내 앞에 멈춰 선다

부드러운 손으로 경직된 내 안에 글자들을 하나씩 꺼내 유심히 살피더니

흘리지 않도록 주머니에 깊숙이 넣고 내 옆에 앉아 글을 시작한다

그동안 너의 싹이 트지 않음은 아직 여물지 않았거나

지친 밭과 피곤한 너의 손을 잠시 쉬게 하려 함이니 포기하지 말고

밭을 비옥하게 하고 몸을 회복시켜 다음 씨앗의 계절을 기다려라

계절이 너의 빈 밭을 지나는 동안 감당하고 인내한 궁핍은

씨앗에게 소중한 밑거름이니 감추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하늘이 보려 함은

너의 수고가 아니라 네 안에 피어나는 사랑이다

네가 봄날 꽃을 보고 즐거워했던 것처럼

하늘도 너의 꽃을 보고 기뻐하는 날

너의 싹이 트고 열매도 맺힐 것이다

다만 경계할 것은 너의 열매가

주위의 가난한 밭에 그 뿌리를 두지 않도록 하라

하늘은 너의 넉넉함이 넘쳐 불행의 씨앗인

무료함이 싹트지 않을까 염려한다 그 넘침의 정도는

너도 하늘도 아닌 주의에 몫이니 돌아보기를 게을리하지 말고

비워 빈 곳을 채워 너의 길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


3.

저자가 굵은 글씨로 글을 마무리한다

하늘은 그 어떤 씨앗도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그 때를 본다

글을 마치자 졸고 있던 글자들이 헛기침을 앞세워 익숙한 듯 자리를 뜨지만

쉼 없이 흐르던 태엽이 풀려 멈춘 나의 시간이 책 안에 나를 가둔다

간간히 먼지들의 흐름만 있을깊은 정적..

저자의 글들이 책에서 몰래 빠져나온다

한동안 머리 위를 어지럽게 맴돌던 글들이

순간 일제히 쏟아져 내린다

무덤 속, 글들이 집요하게 온몸을 파고든다

그들과 내가 하나의 색깔이 되었을 때 풀린 태엽에 힘이 들어간다


허름한 표지 사이로 하늘이 구름을 모으고

계절이 씨줄의 색깔을 바꾸는 소리가 선명하다

조용히 책을 닫고 손에 든 씨앗을 내려놓는다

둘 곳 찾지 못해 어찌할 바 모르는 손이

오랜 시간 잊고 지낸 내 안에 시든 꽃을 기억한다

더듬더듬 미안한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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