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밥

by 노란 보석

요즘 조밥은 웰빙 음식이다.

내 어릴 적 조밥은 그저 한 끼니를 때우기 위한 맛없는 식사일 뿐이었다.


조밭을 매어 보았는가?

유월에 감자를 캐고 나면 조를 심는다. 조가 5센티 정도 자랐을 때쯤 잡초를 뽑는다. 땡볕에 쪼그리고 앉아서 호미로 잡초를 제거한다. 한 여름 땡볕을 받아 지열이 올라오면 온몸이 땀으로 전다. 계속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뽑는 것은 흡사 군사 훈련 중 벌로 오리걸음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땅이 땡볓에 굳어서 풀이 잘 뽑히지 않는다. 조는 이렇게 키우는 과정이 힘들고 품이 많이 든다.


가을에 추수를 해서 멍석을 깔고 털면 작은 씨알들이 떨어져 나오는데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격언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조밥은 겨울에 주로 해 먹었는데 쌀 조금에 보리를 넣고 메조와 차조를 섞어서 밥을 짓는다. 그러면 밥 전체가 노랗다. 어머니께서는 조로 밥을 하면 양이 제일 많이 늘어서 좋다고 하셨다.

조밥은 맛이 없다. 그래도 따슨 밥은 먹을 만했다. 조밥이 식으면 딱딱해서 숟가락이 들어가지 않는다. 시멘트 같이 딱딱한 데다가 깔깔해서 입에서 겉돈다.

형은 "모래알 씹는 느낌"이라 했다.


반찬이래야 배추김치와 동치미에 멸치와 김치 넣고 화로에서 끓인 청국장이 전부다. 찬밥은 뜨거운 물을 부어 말아먹는데 매일 그리 먹으니 질리지 않을 수 없다.

그때는 세끼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집들도 많았으니 조밥을 먹는 우린 그래도 나은 편이었지만 맛이 없는 것은 없는 거다.

식량을 아끼기 위해 물을 많이 부어서 죽을 쑤어 먹기도 했는데 그것은 더 맛이 없다.


옛날 시골에서는 박 꼭지 밑에 지름 4센티 정도 크기 구멍을 뚫어 뜰에 두었다. 그러면 새와 쥐가 박씨를 파 먹어서 속이 비게 된다. 이를 됨박이라 한다. 그 속에 좁씨를 넣고 구멍을 막아 벽에 걸어 놓았다가 이듬해 파종할 때 사용한다.


어느 해 어머니께서 좁씨를 파종하기 위해 됨박을 찾았으나 둔 자리에 없었다. 매년 거기에 보관해 왔었는데 없어지다니 난리가 났다. 그해 결국은 조를 심지 못했고 우리는 조밥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일흔이 되셨을 때 여름휴가차 고향에 뵈러 갔었다. 마침 고추밭에서 일하다 들어오셨는데 땀에 절고 볕에 새까맣게 탄 얼굴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얼굴 두 군데에 까만 딱지가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튿날 수원 피부과에 모시고 가니 흑색종 피부암이란다.

자외선 차단제도 없이 땡볕에서 한 평생 일 하셨으니 피부암에 걸릴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일찍 발견한 관계로 간단한 수술을 하고 방사선 치료를 해서 고칠 수 있었다.


올해 어머니 연세가 여든아홉이신데 낮에는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 밭에 나가서 고추며 고구마, 파, 열무 등 농사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하셔서 허리가 굽고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없어지셨다.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시면서도 농사일을 계속하신다.

골다공증까지 겹쳐서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안쓰러워 일을 그만 하시라고 말려도 듣지 않으신다. 농사 지어 너희들 주는 재미로 일 한다고 하시는데 난감한 일이다.

사서 먹어도 어머니 품삯보다도 적게 들 텐데 그래도 그 마저도 안 하시면 저렇게 건강을 유지하실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며칠 전 어머니를 뵈러 가니 허리가 굽어 흡사 땅으로 기어 다니시는 모양새다.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얼굴을 자세히 보니 또 검은 딱지가 보인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지금 저 연세에 또 수술을 하고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하나 망설여진다.

어머니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신 상황인데 말씀드려야 할지 판단이 안 선다.

다행히 노인들의 피부암은 전이 속도가 느리다고 한다.


오늘은 비가 오길래 집에 계시겠지 하고 전화를 하니 또 안 받으신다. 가뭄 끝에 비가 와서 기분이 좋아 비를 흠뻑 맞으며 일을 하셨단다.

어머니는 한 평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일만 하시면서 사셨다. 언제 한번 쉬실 수 있을지 가슴이 아프다.


오늘 저녁에도 우리 가족은 웰빙 음식으로 오곡밥을 해 먹었다. 다른 곡식은 어머니께서 주셔서 먹는데 조는 사 먹는다. 조를 적게 넣어서일까 밥맛이 좋다. 이렇게 맛이 좋은데 그때는 왜 그렇게 맛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과연 우리 애들이 이 글을 읽으면 이해가 될까?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형이 됨박을 몰래 감춰 버렸단다.

어머니는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조를 심지 않으셨다.


*더운 날씨에 땡볕에서 일만 하시는 어머니가 생각나네요.

그 옛날 추억이 그립습니다.

노란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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