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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 보석 Oct 01. 2016

곶감

덕산 그리고 남명 조식 선생

덕산 곶감

            

                                 <노란보석>

첫서리 하얗게 내리던 가을날
하늘에서 땅으로 끌려 내려와
껍질 도려내는 아픔 감내하고
민망하게 속살 다 드러내면서
죄인처럼 동료와 줄줄이 엮여
시렁에 매달려 백일을 버텼다


대원사 차가운 골바람 맞으며
덕산 맑은 공기로 깊은 숨쉬며
지리산 천왕봉 우러러보면서
남명 후예들 정성을 보시로
치열하게 백일 간 도 닦았으니
참 선비의 도라도 깨치었느냐


젊은 시절 통통하던 얼굴도
매끈하게 아름답던 곡선미도
주홍색으로 빛나던 피부색도
겨울바람에 수분 다 빼앗겨
볼품없이 쭈그러진 얼굴에
새 하얀 분을 예쁘게 바른 들
전설이 된 화려했던 젊은 날


세파의 온갖 유혹 뿌리치고
치열하게 도 닦으며 숙성되니
응축된 향기는 품격을 더하고
천상 최고의 단맛으로 승화해
둥근 몸매로 예쁘게 다듬어서
새하얀 분가루까지 피어 올려
호랑이도 무서운 물건이 되다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을 가는 최단 코스는 경남 산청군 중산리에서 오르는 것이다. 천왕봉의 높이는 1915M이다. 남한에서는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데 건장한 사람들이 열심히 오르면 4시간 반 만에 오를 수 있다.

그 중산리를 가기 위해서는 대전 통영 고속도로의 단성 IC에서 나와 국도로 30분 정도를 더 가야 한다.


그 도중 약 20분 거리에 산청군 시천면 덕산리가 있다.

덕산은 예로부터 곶감이 유명하여 임금님 진상품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덕산 곶감은 지리산 계곡의 청정 자연에서 키운 고종시로 만드는데 당도가 높아 인기가 높다. 고종시는 고종황제께 진상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전에 근무하던 회사의 연수원이 그곳에 있어 교육 관계로 오다가다 들르기도 하였고 지리산에 사진 촬영을 갈 때도 그곳을 지나가게 되어 친근한 곳이 되었다. 나도 곶감을 좋아하지만 아내가 특히 좋아하기 때문에 한 두 상자씩 사 오곤 했다.


덕산 곶감은 10월 말부터 감을 따기 시작하여 11월 중에 박피를 하여 줄로 역어서 시렁에 말리는데 덕산은 공기가 맑고 일교차가 커서 당도 높은 청정 곶감을 만들 수 있어서 인기가 높다.


겨울철 덕산에 가면 집집마다 시렁을 매고 곶감 말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요즘은 건시뿐만 아니라 반건시도 말랑말랑하여 먹기 좋고 보기도 좋아서 인기가 있는 것 같다. 나도 역시 반건시를 좋아한다.






그런데 덕산은 사실 곶감 보다도 성리학자이며 유학자인 남명 조식 선생이 더 유명한 곳이다.

지리산 가는 길에 꼭 한번 둘러보기를 권한다.


조식(曺植) (1501년 ~ 1572년)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며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다.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중략>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퇴계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위키백과>



덕산에는 남명 조식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라는 곳이 있고 선생을 기리는 덕산 서원도 있다. 또 산천재에서 바라다 보이는 뒷산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 남명 선생이 생전에 친히 터를 잡았다 하는데 앞으로는 덕천강을 바라보면서 지리산 자락의 많은 산 줄기들이 역행하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어 풍수학적으로 좋은 자리라고 한다.


퇴계 이황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서신 교류도 많이 하였지만 학문적으로 사상적으로 대립하고 비판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퇴계가 학문적 이론에 심취하여 기대성과 이기 논쟁을 벌일 때 쓸데없는 공리공담으로 치부했다.

선생의 학문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해야 된다는 실천궁행 해야 한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 선생의 견해였다. 이러한 현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후일 북인 학파와 남인 실학파들이 실천, 실용성을 강조하는 풍토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실용적이고 의를 중시하는 선생의 사상은 홍의 장군 곽재우 등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에 의병으로 가장 많이 활동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난세에는 벼슬을 하지 않아야 한다며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한편 1544년 벼슬길에 나가보라는 퇴계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퇴계 이이가 그에게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하자, 이황 자신도 여러 번 사직하고 사퇴하면서, 자신 더러는 관직에 나갈 것을 권고하는 저의가 뭐냐며 추궁하기도 한다. 이황이 주로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 이론 공부에 심취했던 반면 남명은 이론 논쟁을 비판하면서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노장 사상 등 이단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였던 그는 조선 시대 내내 다른 유학자들이 도교와 노장 사상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노자와 장자에게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본 몇 안 되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황은 그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라고 비판했는데, 조식은 이에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 하며 허명을 훔친다"라고 맞대응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위키백과>


남명 조식 선생은 상소도 여러 번 올리면서 왕의 실정을 비판하였는데 특히 단성 현감 사직 시 올린 상소는 '단성소'라고 불리며 '을묘 사직 소'라 하여 유명하다.

선생은 당시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비판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사에서는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며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 만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적극 변호하여 파문을 가라앉혔다 한다.



(중략) 전하의 정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해버렸습니다. 하늘의 뜻은 이미 가버렸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마치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벌레가 속을 파먹고 진액도 다 말라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까마득히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까지 이른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중략) 자전(紫殿)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고, 전하께서는 나이 어려 선왕의 고아일 뿐입니다. 천 가지, 백가지나 되는 천재(天災), 억만 갈래의 인심을 대체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하시렵니까?(중략) <위키백과>


남명 선생이 만년에 산천재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칠언절구로 지은 시를 보면 선생의 어떤 마음 가짐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春山底處无芳草 / 봄날 어디엔들 방초가 없으리요마는

只愛天王近帝居 / 옥황상제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만을 사랑했네

白手歸來何物食 /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

銀河十里喫猶餘 / 흰 물줄기 십리로 뻗었으니 마시고도 남음이 있네




*남명 선생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지도 500년 하고도 15년이 지났다. 진정한 선비가 무엇인지 몸소 실천하고 깨우쳐 주신 큰 선생님을 기리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노란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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