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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 보석 Mar 21. 2021

2.1 경거망동

 제2장 : 일장춘몽(一場春夢)



 2.1 경거망동



  밤새 범말에 함박눈이 내려서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동네 아이들이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도 하며 추위도 잊고 신나게 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눈이 우리 참새들에겐 하나도 반갑지 않다. 당장 눈 때문에 먹을 것이 보이지 않으니 아침 걱정부터 해야 할 판이고, 창공에 높이 떠서 호시탐탐(虎視眈眈) 노리는 솔개의 눈을 피해 안전도 도모해야 한다. 솔개는 눈이 밝아서 2~3백 미터 높이에서도 땅에 기어가는 쥐를 본다고 한다. 

*호시탐탐(虎視眈眈) 범이 눈을 부릅뜨고 먹이를 노려본다는 뜻으로,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하여 형세를 살피며 가만히 기회를 엿봄. 또는 그런 모양.


  범말에 사는 농부 홍보석은 눈이 내리자 할 일이 없어졌다. 눈을 치운 후 아침을 먹고 나서 심심하니 참새 사냥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같은 날이 얄미운 참새들을 손보는 데 더없이 좋은 날씨이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논농사를 망쳐 놓더니 요즘은 소 사료까지 빼앗아 먹으니 몹시 괘씸하다. 마침 술 생각도 나는데 마땅한 안주가 없던 참이다. 

  “그래, 참새고기보다 더 좋은 술안주는 없지.” 

  참새를 잡아 용팔이와 칠뜨기는 물론, 동네 친구들을 불러 소주 한잔할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보석은 벼 낟알 한 종지에 보드카를 붓고 30분 정도 불렸다. 보드카를 사용하는 것은 알코올 도수가 높고 무색무취(無色無臭) 하기 때문이다. 지난번 앞산에 나무하러 갔을 때 잘 마른 떡갈나무 잎을 여러 장 준비해 놓은 게 있었다. 땅콩 껍데기도 한 바가지 따로 준비했다. 눈이 많이 내렸으니 이 방법을 쓰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비교적 한적하고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의 눈을 깨끗이 치우고 떡갈나무 잎을 겹치지 않도록 정성껏 깔아 놓았다. 다음에는 그 위에 스프레이로 약간의 물을 뿜어 적셔 놓은 후, 그 위에 작년 가을에 미리 준비한 땅콩 껍데기를 여기저기 뿌려 놓았다. 마지막으로 미리 보드카에 불려놓은 벼 낟알을 흩어서 뿌린 후 콧노래를 부르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방에서 화롯불을 끼고 앉아 고구마와 밤을 구워 먹으며 참새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눈이 와서 먹을 것이 귀해 아침을 거른 참새가 그곳을 그냥 지나칠 리가 만무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까?’라는 말까지 있으니 말이다.


  “얘들아 저기 좀 봐라! 짹짹!”

  “먹을 것이 지천이네! 야~ 신난다!”

  “짹짹, 다 모여라. 배고픈데 빨리 먹고 가자!”


  짹짹거리며 참새들이 신이 나서 동료들을 불러 모은다. 아침을 걸러 배가 고픈 참새들은 망설임 없이 낟알을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데 맛이 약간 이상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부모님으로부터는 물론, 선생님으로부터도 경거망동(輕擧妄動) 하지 말라고 귀가 아프도록 듣고, 시험 때도 안전 과목은 100점 만점을 맞았었다. 그러나 배고픔이란 원초적 생명 현상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한 놈, 두 놈 비틀거리더니 횡설수설(橫說竪說)하기 시작한다. 술에 약한 참새는 독한 보드카에 취해서 비틀거린다. 햇볕은 따뜻한데 독주에 취하다 보니 뵈는 게 없는 것 같다.

*횡설수설(橫說竪說) : 말을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하다, 두서가 없이 아무렇게나 떠드는 것


  “솔개~ 다 나와! 째~애~액 째~액~”

  “네놈들 오늘 다 죽었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고 하더니 이렇게 호기롭게 외치는 놈도 있다. 드디어 횡설수설(橫說竪說) 말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배는 부르고 햇볕은 따뜻하니 술에 취한 참새들은 비틀대다가 드디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더는 밀려오는 졸음을 참을 수 없는데, 마침 옆에 땅콩 껍데기가 있으니 베개 삼아 베고 눕는다. 이제 세상에 아무런 걱정이 없다. 배는 부르고 알코올 기운까지 있으니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행복한 기분이다. 마음은 있는데 몸은 점점 바닥으로 잠기는 느낌이다. 이제 내 의지로는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그게 뭐 대순가? 기분만 좋으면 되었지. 어느 순간 참새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꿈나라로 빠져든다. 어떤 놈은 벌써 코를 ‘재~액 재~액’ 고는 놈까지 있다.



  참새가 꿈속에서 정의의 사도가 되어 그동안 참새를 공격했던 솔개를 쳐부수러 나간다. 


  술에 취한 참새에겐 뵈는 게 없고 거칠 것도 없다. 이참에 솔개를 혼내주고 다음엔 올빼미도 손을 봐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세상 어떤 동물도 겁날 게 없다. 

  ‘하루 참새 솔개 무서운 줄 모른다.’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술에 취해 천방지축(天方地軸)인 참새들이 솔개를 쫓아 좌충우돌(左衝右突)한다. 그 광경을 인자하게 생긴 하얀 돼지가 지켜보고 기가 차서 배시시 웃는다. 아~ 이건 돼지꿈이다! 이번 주에는 집을 팔아서라도 로또복권을 사야겠다. 로또 복권만 당첨되면 벼를 가마니로 사놓고 평생을 편하게 먹고살 수 있으니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

*천방지축(天方地軸) 하늘 방향이 어디이고 땅의 축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뜻으로, 너무 바빠서 두서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

*좌충우돌(左衝右突)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부딪침


  참새 떼의 난데없는 공격에 깜짝 놀란 솔개가 황급히 도망간다. 이게 웬일인가! 솔개만 보면 죽을 둥 살 똥 도망만 다니던 참새가 단체로 솔개를 공격하다니! 그렇게 위풍당당(威風堂堂)하던 솔개가 얼떨결에 놀라서 허겁지겁 도망가다 나뭇 가리에 머리를 처박고 숨는다.

*위풍당당(威風堂堂) : 풍채가 위엄이 있어 당당함


  “엄마야~ 솔개 살려!”


  살면서 처음 이런 말이 솔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흡사 솔개에 쫓기던 꿩이 나뭇 가리에 머리만 처박고 숨는 광경과 흡사한데, 이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던 꿩이 ‘킥킥 킥’ 숨죽여 웃다가 참을 수 없어 크게 웃음보를 터트렸다.


  “커겅컹~ 꿩꿩~” 

  꿩이 웃는 소리에 그만 솔개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야? 이놈들이! 참새 이 조그만 것들이 미쳤나감히 어디서 하늘의 제왕 솔개한테 까불어!” 


  솔개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반격을 시작한다. 이 솔개야말로 이번에 죽을 고통을 감내하면서 부리와 발톱을 바위에 부딪쳐 깨서 뽑아내고, 새것을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 입지전적인 혁신 솔개이다. 

  참새가 삼십육계(三十六計) 줄행랑’을 치지만 오금이 저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이건 날개가 펴지지 않는다. 아무리 날아보려 날개를 흔들어 보아도 무언가가 점점 옥죄어 오는 느낌이다.

*삼십육계(三十六計) : 서른여섯 가지의 꾀 또는 병법. 또는 달아나는 것이 상책임을 나타내는 말


  “뭐지? 이런 고약한 기분은?”


  너무 놀라서 오줌을 지린 것 같다. 유치원 때 오줌을 한 번 싼 적이 있으나 커서는 처음이다. 솔개의 반격이 무서운 데다 오줌까지 쌌으니 기분이 찝찝하다. 역시 새가슴인 것을 들킨 것 같아 창피하다. 시쳇말로 쪽팔린다고 할까, 그런데 이건 멍석말이를 당한 느낌이다. 처음 당해보는 황당한 상황에 잠이 확 깨지만,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 있어 머리도 아프고 몸도 무겁다. 이제 나는 어찌 되는 거지?



  잠시 좋다 만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 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보석은 나무할 때 쓰는 대나무 갈퀴를 가지고 떡갈나무 잎에 싸인 참새를 쓱쓱 긁어모았다. 신나게 바구니에 쓸어 담는데도 참새는 꼼짝할 수 없으니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속수무책(束手無策) : 손을 묶은 것처럼 어찌할 도리가 없어 꼼짝 못 함.

  서당 처마 밑에서 몰래 엿듣고 배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도 생각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전에 엄마가 했던 말도 생각난다. ‘네가 아무리 약고 머리가 좋아도 인간은 너보다 몇 배 똑똑하니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되 의심하며 살아라’라고 아침저녁으로 말씀하셨다. 이제서 뼈에 사무치게 후회되는 데 왜 중요한 건 모두 당하고 나서야 깨닫는 단 말인가! 역시 서당에서 엿듣고 배운 ‘경거망동(輕擧妄動) 하지 말라는 말도 생각나지만 인제 와서 어쩌란 말인가!

*새옹지마(塞翁之馬)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말.


  인간은 이럴 때 절대 인정사정(人情事情) 봐주는 것이 없다. 더구나 상대는 악당 보석이 놈이니 상대가 작다거나 약하다고 절대 봐주지 않는다. 가슴 치며 후회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잠시 방심한 탓에 하나밖에 없는 아까운 목숨을 잃게 생겼다. 역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만, 후회하고 한탄해도 소용이 없다. 자포자기(自暴自棄)하고 운명에 목숨을 맡기는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처지가 되었다.

*자포자기(自暴自棄) 절망에 빠져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보지 아니함.


  이리될 줄 알았으면 참새 중에 아이큐가 제일 높은 똑참이가 삼 년 전에 한 주장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똑참이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한겨울에 눈이 많이 올 때를 대비하여 곡식을 다람쥐처럼 저장해 놓고 살자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서로 제가 잘났다며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의견을 쏟아내서 갈등만 커지고 혼란은 가중되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음. 

*중구난방(衆口難防) 뭇사람의 말을 막기가 어렵다는 뜻, 막기 어려울 정도로 여럿이 마구 지껄임을 이르는 말. 

  <참새민국>에서 좀 모자란다고 알려진 멍참이는, 곡식을 숨겨 놓아 보았자 쥐 좋은 일만 하는 것! 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항상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하며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를 입에 달고 살던 보참이는, "조상 때부터 이렇게 살아왔는데 귀찮게 뭣 하러 그렇게 복잡하게 살 건가?"라고 목청을 높였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앎.

  <참새민국>도 이제 혁신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학파 신참이는, "세상이 엄청나게 바뀌고 있는데 이렇게 그냥 있으면 우리 참새도 황새처럼 결국 멸종하고 말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귀담아듣는 참새는 많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똑참이는 <이솝 우화>의 ‘개미와 베짱이’를 예로 들며 열심히 일해서 겨울을 대비하자며 다시 자기의 주장이 옳았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놀기 좋아하는 놀참이는, "개미는 평생 일만 하다 죽는데 그런 개미가 부러운 건가?"라고 하면서 "진정한 행복은 먹는 데 있지 않고 자유롭게 세상을 날아다니면서 노는 데 있다!"라고 주장했다. 

  보참이도 그 말에 동조하면서, "베짱이가 겨울에 못 먹어서 다 얼어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해마다 유월이면 베짱이가 죽지 않고 나와서 우리가 얼마나 맛있게 잡아먹었느냐!"라고 말했다. 

  그러자 혁신파인 혁참이가 나서서, "우리도 인간처럼 농사를 직접 지어 자급자족(自給自足)하여 먹을 것 걱정 없이 살자!"라고 주장했지만, 현실성이 없다고 모두의 비웃음만 샀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물이다’라고 했듯이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으면 뭐 하는가. 참새가 무슨 농사를 어떻게 짓는다는 말인가!

*자급자족(自給自足) 필요한 물자를 스스로 생산하여 충당함.

  이렇게 이런저런 반대 의견과 찬성 의견이 백가쟁명(百家争鸣)식으로 쏟아져 나오니 결론이 날 리 없었다. 

*백가쟁명(百家争鸣) : 많은 학자나 문화인 등이 자기의 학설이나 주장을 자유롭게 발표하여 논쟁하고 토론하는 일. 문화혁명 때 유행함.


  리더인 대참이가 양자택일(兩者擇一) 하자며 민주주의(民主主義) 원칙에 따라 다수결로 정하자고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찬반 참새 수를 세는 것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열까지는 세었지만, 참새의 머리로 그 이상을 세는 건 무리였다. 오죽하면 머리 나쁘고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을 빗대어 ‘새대가리’라고 하겠나. 

*양자택일(兩者擇一) : 둘 중에서 하나를 고름.   

  문제는 우리 참새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똑참이가 아이디어를 내서 침착하게 열씩 나누어 세었으나 더 큰 문제가 나타났다. 오합지졸(烏合之卒)인 참새들이 이리저리 움직여 자리를 바꾸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세기 시작했으나 헷갈려서 다시 세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세는 것이 늦어지자 저마다 잘났다고 나서서 어찌 세는 게 좋겠다고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떠드니 시끄러워 정신이 없었다. 해 넘어갈 때까지 반도 세지 못하고 자러 가야 해서 결국은 무산되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대참이는 고심 끝에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다.

  전에 우리 동네 범말에 사는 바보 형제가 닭장 안에 있는 닭 다섯 마리를 세는데 자꾸 움직여서 온종일 세어도 못 세었다 한다. 사흘간 심사숙고(深思熟考) 끝에 꾀를 내어 묶어 놓고 세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비슷한 상황이라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날은 모든 참새가 점심도 걸렀다.

*심사숙고(深思熟考) 깊이 잘 생각함.


  보석이가 참새 담은 바구니를 들고 희색만면(喜色滿面)해서 가는데 외양간 황소가 보고 ‘음매~~’하고 비웃는다. 전에 등에 타서 방약무인(傍若無人)하며 제가 잘났다고 놀리던 참새가 꼼짝 못 하고 잡혀가는 걸 보니 불쌍하다는 생각에 앞서 속이 다 시원하다. 황소 비웃는 소리가 졸지에 잡혀가는 참새들에게는 ‘바보~ 고소하다.’라고 들렸다. 

*희색만면(喜色滿面) 기쁜 빛이 얼굴에 가득함.

*방약무인(傍若無人)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태도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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