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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 보석 Oct 30. 2022

8.1 자유를 찾아서

제8장 : 신 개척시대



8.1 자유를 찾아서



  반란이 성공했으니 산으로 가서 자유를 누릴 것인가?

  반란이 있던 날 소들은 전승 보고대회가 끝난 뒤 잠시 혼란에 빠졌다. 이왕 이렇게 우리를 뛰쳐나온 김에 산으로 들어가자는 의견이 젊은 층에서 나왔다. 그러나 노장년층에서는 그리해 보았자 곧 인간들에게 발견되어 잡혀올 것인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는가?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고심 끝에 결국은 대장 누우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고, 누우는 당우와 방우 등 지도부의 의견을 참고하여 심사숙고(深思塾考)한 끝에 소 외양간에 복귀하기로 했다. 굳이 산으로 간다면 막지는 않겠다고 했다. 젊은 소 몇 마리가 설왕설래(說往說來)했지만, 결국은 전원이 외양간으로 복귀하였다.

*설왕설래(說往說來) : 서로 변론을 주고받으며 옥신각신함. 또는 말이 오고 감.

  그러나 <와우 공화국> 젊은 친구들은,

  차라리 참새의 자유로운 삶이 부럽다.

  산천초목(山川草木) 우거진 야외에서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

  *산천초목(山川草木) : 산과 내와 풀과 나무라는 뜻으로, 자연을 이르는 말.

  ‘인간이 주는 사료를 받아먹으면 당장은 편하겠지만, 

  가고 싶은 곳도 못 가보고, 

  보고 싶은 것도 못 보고,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감옥에 갇혀 살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고 한탄했다.

  그렇다고 그곳을 박차고 나와서 새로운 삶에 도전할 용기도 없었다.


  갈등이 있기는 닭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왕 이렇게 나온 김에 산으로 가자는 파와 그 험한 곳에 가서 어찌 살 것인가? 하고 반대하는 파로 갈렸다. 오늘 용참 대통의 연설을 듣고 감동한 젊은 닭들이 산으로 가자는 파에 많았다. 닭들은 난상토론(爛商討論) 끝에 각자 자유의사(自由意思)에 맡기기로 했는데 젊은 수탉 세 마리와 암탉 여섯 마리가 산으로 들어갔다.

*난상토론(爛商討論 : 여러 사람이 모여서 충분히 의논함. 또는 그런 의논.

  산으로 가지 않은 닭들은, 

  ‘우리 닭들은 오래전부터 인간에게 길들여져 이제는 날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적자생존(適者生存)의 험한 산속에서 어찌 살 것인가!’라고 핑계를 대며 자위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멸망하는 현상.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가 제창하였다.

  그렇지만 마음껏 날아다니는 까치나 참새가 부러운 건 사실이었다. 산으로 간 동료들은 잘 사는지 항상 그리웠다.  


  돼지들도 따로 모여 난상토론(爛商討論)을 벌였다. 오늘 용참 대통의 연설을 듣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린 젊은 돼지들은 자유를 찾아 떠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방돈이를 비롯한 원로들은 오늘 우리가 겪었듯이 바깥세상은 놀기 좋을지는 몰라도 배불리 먹고 살기에는 문제가 있다며 지족 지계(止足之戒)하며 살자고 잔류를 주장했다.

*지족 지계(止足之戒) : 제 분수를 알아 만족할 줄 아는 경계

  이미 점심을 걸러 몹시 허기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논쟁 자체를 귀찮게 생각하며 빨리 돌아가자고 채근하는 돼지도 많았다. 방돈이가 민주주의(民主主義) 원칙에 따라 다수결로 정하자며 잔류파와 탈출을 원하는 혁신파가 나누어 서도록 했다. 당연히 잔류파가 80%를 넘었다. 그러나 숫자를 세기도 전에 우르르 돼지우리로 몰려가버렸다. 혁신파도 머뭇거리다가 하나둘씩 ‘핫바지 방귀 새듯’ 빠져 돌아가 버렸다. 결국은 모두 돈사로 복귀해서 주인이 주는 먹이를 게걸스럽게 먹었다. 당장 배가 부르니 기분이 좋았다. 돼지에게 자유란 어쩌면 ‘돼지 목에 걸은 진주 목걸이’ 같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탈출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던 혁신파 청돈이는, 

  ‘이럴 거면 뭐 하러 반란에 가담은 했나? 

  또다시 이런 냄새나는 우리에서 생각 없이 살아야 한단 말인가? 

  ‘개돼지처럼 사느니~’라며 비웃는 새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라고 

  후회하며 한탄했지만, 귀담아듣는 친구는 한 마리도 없었다.

  돼지는 원래 코가 지금처럼 뭉뚝하게 잘리지 않았으나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변했다 한다. 

  식탐이 많은 돼지는 항상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불만이었다. 위는 크고 식탐도 있는 반면에, 입맛이 까다로워서 아무거나 먹지 못했다. 

  참을성 없는 돼지가 조물주를 찾아가서 항의했다. 돼지는 항상 배고픈 괴로움을 말하며 이를 해결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조물주는 한번 만든 작품을 세상에 내보낸 후에 고쳐준 예가 없다.라고 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물러날 돼지가 아니었다. 자기들은 분명 오작으로 태어났다 하며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로 고쳐 줄 것을 눈물로 신신부탁(申申付託)했다. 일부 돼지는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단식투쟁(斷食鬪爭) 하자고 선동했으나 그것이야말로 돼지가 지킬 수 없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단식투쟁(斷食鬪爭)을 시작하고 하루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요구 자체를 쉽게 포기할 돼지는 아니었다. 매일 떼로 몰려와 하도 애걸복걸(哀乞伏乞)하며 시끄럽게 졸라대니, 성가셔서 견디다 못한 조물주는 그렇다면 위를 작게 해서 조금만 먹어도 배부르게 해 주면 되겠냐고 물었다. 돼지는 먹는 행복을 포기하라니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며 화를 버럭 내고 그럴 것 같았으면 여기 찾아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럼 아무거나 먹어도 맛이 있도록 해주면 되겠냐고 물으니, 당연히 그게 좋겠다고 했다. 그 대신에 얼굴이 조금 못생겨질 수 있는데 괜찮으냐고 물으니, 아쉽지만 먹는 행복이 제일 중요하다며 기꺼이 수락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자기가 저지른 일은 자기가 해결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

*신신부탁(申申付託) : 거듭하여 간곡히 하는 부탁.

*애걸복 결(哀乞伏乞) : 소원 따위를 들어 달라고 애처롭게 사정하며 간절히 빎.


  돼지 코는 원래 길쭉해서 냄새 맡는 기능이 발달해 있었다. 조물주는 냄새 맡는 세포가 몰려 있는 코의 끝부분을 잘라내 버렸다. 그렇게 해서 코가 잘린 변화된 모습이 지금의 돼지 모습이다. 이 말은 코가 길쭉한 멧돼지와 비교해 보아도 꽤나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전에는 냄새를 맡고 입맛에 맞지 않으면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팠으나, 이젠 환골탈태(換骨奪胎)해서 아무것이나 맛있게 잘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얼굴이 좀 흉해졌으나 입맛 나고 배부른 행복에 비하면 비길 바가 아니었다. 조물주에게 매년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돼지는 그 후로는 쉰 것도, 조금 상한 것도 잘 먹었으니 살이 빨리 쪄서 인간들이 집에서 기르기에 제일 좋은 가축이 되었다. 

*환골탈태(換骨奪胎) : 뼈대를 바꾸어 끼고 태를 바꾸어 쓴다는 뜻. 사람이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여 전혀 딴사람처럼 됨.


  돼지의 장기가 인간과 비슷한 관계로 요즘 의학용으로 바이오 돼지를 특별 생산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인간과 유전자가 비슷해서 유용하다고 하는 그럴듯한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수백만 년 전엔 조상이 같았다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긴 인간도 돼지 못지않게 먹는 건 자제를 못하는 걸 보면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술 마시고 죽다 살아나서도 한 이틀만 지나면 또 마시는 게 인간 아닌가. 돼지도 원래 깔끔한 동물이었으나 냄새 맡는 기능이 퇴화하다 보니 똥, 오줌 등이 있는 더러운 곳에서도 잘 지내게 되어 지저분한 동물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한다.


  한편 김만수 집에서는 황구를 찾느라 난리가 났다. 

  황구는 가축들의 반란이 있던 날 저녁때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온 동네를 샅샅이 찾았지만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혹 동네 사람 중에 누가 몰래 잡아먹었는가 은밀히 조사도 했으나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 후 들으니 옆 동네 멍순이도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람들은 요즘 개장수들이 개를 몰래 잡아간다는데 혹 그런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했다.  

  ‘개돼지처럼 사느니~’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원래 우리 까치나 참새가 많이 사용하던 말이다. 우리는 ‘사느니’에 이어서 여러 말을 붙여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말이 ‘개돼지처럼 사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이다. 고생은 되어도 자유롭게 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말로 우리 새들 세상에서는 명언 중의 명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걸 비유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 걸 보았다. 나 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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