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작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단순했다. 학생책쓰기 프로젝트 지역운영교 업무를 맡아 1년간 진행했고, 올해 도교육청에서 학교 표창이 내려왔다. 하루 종일 몰두해서 공적조서를 썼다. 최근 몇 년간 학교표창이 없어서 공적조서에 넣을 학교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적는데도 여기저기 문의를 해야 했다. 학교장 직인을 찍어야 해서 교장실을 찾아 학교 표창을 받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교장 선생님은 오랜만에 학교 표창받는다며 좋아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학생들 책이 언제쯤 발간되나요? 출판기념회 같은 걸 좀 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수고했다고 꽃도 보내고, 학생들이 성취감도 느끼고 말이야."
우리 부서 부장이 자신도 직인을 받아야 하니 교장실에 같이 가자고 해서 함께 들어간 게 문제의 시작이었을까. 작년에 학생책쓰기 업무를 맡아했던 부장은 옆에서 듣더니 냅다 교장 선생님의 말을 이어받았다.
"교장 선생님,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사실 작년에 제가 학생책쓰기를 신청해서 시작했는데, 예산이 너무 늦게 내려오는 바람에 뒤늦게 책이 출간되어서 작년에는 출판기념회를 못 열었거든요. 올해 작년 아이들 책도 함께 전시하고, 출판기념회를 같이 열면 좋을 것 같아요."
어라? 학생책쓰기 사업을 본인이 시작했다는 깨알 홍보를 자연스럽게 얹는 스킬을 보여주고, 작년 아이들도 포함해서 일을 얹는 이 순발력은 뭐람...
"그렇지? 역시 우리 윤 부장이야. 아이들이 책을 쓴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에요. 출판기념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축하도 받고 성취감도 느끼고 하면 좋죠."
윤 부장의 거드는 말에, 교장과 부장은 둘이 쿵작이 맞아 신이 나서 말했다. 출판 전시회를 일주일 간 교내에 할 예정이며, 동아리 시간에 학생 저자와의 대화의 장을 마련해서 우리끼리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계획했다는 말을 조심히 꺼냈으나 교장과 부장 양쪽의 합세에 밀렸다. 상황을 보니 출판기념회를 못한다고 버틸 명분이 약했다. 어쩔 수 없지. 바로 태세 전환하여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부장님이랑 일정 잡아보고 상의해서 출판기념회 준비해 보겠습니다."
학교 표창을 받게 한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괜히 엄한 일을 받아서 돌덩이를 얹은 무거운 마음으로 교장실을 나온 게 한 달쯤 전이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출판기념회를 준비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온 정신을 빼앗겼다. 부장은 해외 연수를 비롯해 여러 출장으로 2주 가까이 자리를 비웠다. 부장과 상의를 할 수도 없고, 같이 책쓰기 지역운영교 업무를 하고 있는 다른 학교 선생님들과의 단톡방에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출장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관내 중학교 수석님께서 출판기념회 운영계획서를 공유해 주셨다. 타학교 계획을 참고하여 우리 학교 상황에 맞게 몇 가지 아이디어를 추가하여 대략 계획은 다 세워놓았다.
그러느라 12월에 2주 정도 부수입까지 있는 출장을 갈 수도 있었으나 올해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부장이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출판기념회 계획서를 보여주었더니 아주 좋다고 했다. 내년에 부장은 다른 부서장을 맡게 되어서인지 출판기념회에 별 신경도 안 썼다. 작년에 부장이 지도한 아이들이 준비해야 할 내용을 전달해 주는 정도였다.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안내문, 일정표, 홍보 포스터, 간식거리 등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정말 많았다.
"지난번에 축하꽃은 교장 선생님이 사 주신다고 했는데요. 그럼, 품의를 어느 예산에서 누가 해야 하나요?"
"에이, 우리 부서 예산에서 여기서 품의 올려야죠."
부장의 대답에 교장님이 꽃을 보낸다고 했던 말을, 내가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나 싶었다. 부장이 뭐 도울 게 없냐고 해서 품의는 내가 올릴 테니, 이 지역을 내가 잘 모르니 괜찮은 꽃집에서 꽃만 좀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사회 보는 학생들 시나리오와 PPT 확인 및 수정, 북토크 사전 질문 정리, 책 소개글 수합 및 출력 등 소소하게 신경 쓸 것도 참 많았다. 자면서도 출판기념회 관련 꿈을 꾸느라 자고 나서도 피곤이 더했다.
12월 26일이 7교시에 한 시간 동안 리허설까지 마치고, 진행 상의 소소한 수정사항을 체크했다.
27일 드디어 출판기념회 당일. 3시간 수업을 하고, 공강 시간에 틈틈이 마무리 준비를 했다. 점심을 급하게 먹고, 미리 주문해 놓은 샌드위치를 찾으러 급하게 나가는 길. 운동장에는 쌓인 눈을 뭉치며 신나게 눈싸움을 하는 2학년 남학생 무리가 있었다. 왠지 느낌이 싸했다. 그중에 내가 수업하는 남학생 몇 명이 나를 보고 인사했다. 인사를 받으며, 손짓으로 주차장 쪽을 가리키며 눈 던질 때 조심하라고 했다. 주차장 쪽으로 몇 걸음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한 덩어리의 눈이 날아와 퍽, 소리를 내며 나의 검정 코트 오른쪽을 명중시켰다.
"누구야??"
뒤돌아서 눈싸움하는 남학생 무리 쪽으로 갔다.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자진신고하자. 얘들아."
아이들 표정을 보니 내가 가르치지 않는 어떤 남학생이라는 예감이 딱, 들었다. 내 추궁에 아이는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곧 이실직고했다. 옆에 있던 내 수업을 받는 남학생 두 명이 오히려 미안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안 그래도 예민한데, 불쾌한 감정까지 더해졌다.
6교시는 평소에도 시끄럽고 산만해서 일주일에 한 시간 수업인데도 피곤한 1학년 10반 수업이었다. 특히 까불까불한 남학생들이 많은 반이었는데, 어떤 아이가 몰래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다 나한테 딱 걸렸다. 핸드폰을 달라는 내 말에도 몇 분을 버티면서 깐족거렸다. 올해 처음으로 수업 시간에 큰 소리를 냈다. 휴. 출판기념회는 시작도 안 했는데, 멘탈까지 탈탈 털린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아이들과 불편한 일들이 기분도 상하고 신경 쓰였다.
6교시가 끝날 무렵, 교장, 교감 선생님은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좀 늦으니 꽃 전달은 미리 하고, 축사는 마지막에 하겠다고 연락을 주셨다. 에고, 결국 이럴 것을... 30명의 학생들에게 교장 선생님이 어떤 방식으로 꽃을 전달하는 게 좋을지 이리저리 궁리하고 배경음악까지 골라 놓았는데, 기운이 빠졌다. 6교시 끝나자마자 급하게 사회자에게 변경사항을 전달하고 시나리오 수정을 도왔다.
7교시 드디어 출판기념회. 아침부터 전교직원에게 메신저로 출판기념회를 알리며, 시간이 되시면 참석해 달라고 했으나 국어교사 딱 한 명이 왔다. 그리고 동아리 시간에 글쓰기 특강을 3회 해 주신 작가님이 축하하러 오셨다. 이럴 것을... 무슨 거창한 축하를 받는다고, 굳이 이렇게까지 출판기념회를 하자고 했나 원망마저 들었다. 교사들은생기부 쓰느라 정신없는 시즌이고, 각자의 일이 바빠서 다른 부서 행사에 참여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학원을 향해 가니 친구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할리가 없다는 것도.내가 처음에 계획한 대로 그냥 우리 동아리 내에서 저자와의 대화 시간으로 진솔하게 진행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도 리허설 후 사회자 연습을 따로 시켰더니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진행을 참 잘했다. 북토크도 지루하지 않고 순조롭게 잘 이루어졌다. 뒤늦게 참석한 교장선생님이 축사를 하면서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스무 살도 안 되었는데 벌써 책을 발간한 학생들이 정말 대단하고 멋지다며 추켜세우셨다. 폐회 후 기념 촬영까지, 계획된 시간 안에 모든 순서가 잘 마무리되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은 전시된 책과 소개글, 홍보 포스터를 보면서 계속 감탄했다.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교장 선생님은 부장한테 고생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부장이 근처에 있던 나를 가리키며 내가 준비하느라 애썼다는 말을 하려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교장 선생님은 자기 말만 하고 뒤돌아서 휙 가버렸다.
꼭 인정을 받으려 한 일은 아니지만, 재주는 내가 부리고 칭찬은 부장이 받는 것 같아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뒷마무리 후에 교장 선생님께 샌드위치와 음료수, 기념품을 갖다 드릴 때, 고생했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나의 공을 온전히 다 인정받지 못한 느낌에 어딘가 찝찝함이 남았다.
다음 날 교장 선생님이 내 자리로 전화해서 축하꽃이 너무 예뻤다며 어느 꽃집에서 했냐고 물었다.
하필이면, 이 지역의 꽃집을 몰라서 부장에게 부탁한 딱 한 가지 꽃집을 물어볼 게 뭐람. 다른 모든 준비는 내가 다 했는데 말이다. 바로 부장이 교무실에 들어와서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네, 교장 선생님! 아이, 아녜요~ 호호. 꽃집 이름은요."
교장의 수고했다는 말을 또 부장이 받는 것 같았다. 첫 시작부터 교장님의 말에 동조하여 부장이 출판기념회를 열자고 해 놓고, 정작 준비는 내가 거의 했지만 자꾸 인사는 부장이 받는 상황이 불편했다. 인사받자고 한 일은 아닌데, 내가 A부터 Z까지 한 달간 계획하고 꼼꼼하게 준비하느라 매일 꿈까지 꾸면서 신경 썼는데, 공을 나눠 받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고,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내가 이렇게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나 싶기도했다. 열심히 글을 써서 한 권의 책을 발간한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제공해 주었고, 아이들이 좋아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오늘은 동아리 발표회 및 축제날. 동아리 발표회 준비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출판기념회 때 생각만큼 선생님이나 다른 친구들이 별로 안 와서 너희들이 쓴 책을 못 본 게 아쉽지 않니? 오늘 전시회 때도 몇 명이 올지 모르는 거고. 그래서 말인데, 다음 주에 이틀 정도 교내 복도에 책을 전시하는 게 어떨까? 어차피 준비는 다 해 놓았고, 지금 전시해 놓은 책이랑 소개글, 포스터만 그대로 복도에 옮겨 놓으면 되는데. 생각해보고 너희들의 원하는 대로 정하렴."
아이들은 모두 좋다고 했다. 하여 다음 주까지 출판전시회는 연장하기로 했다.
괜히 쓸데없는 것에 기분 상하지 말고, 지도교사로서 내가 최선을 다했고, 아이들에게 성취감과 자존감을 높여 준 것에 만족하려 한다. 그리고, 이번 주말은 정말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모든 에너지가 다 방전된 것 같다. 아직 방학은 일 주일도 더 남았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하나. 방학만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