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반가운 안부
부산에서 열리는 1박 2일 워크숍에 참석하는 김에 며칠 일찍 내려가서 부산 여행을 했다. SRT를 타니 약 2시간 30분 만에 부산 도착. 물론 집에서 SRT역까지 버스로 가는 시간이 있지만, 확실히 SRT를 타니 멀리 갈 때 참 빠르고 수월하다.
부산에서의 첫날은 여행보다는 오랜만에 만나는 K와의 약속이 있어 설렜다. K는 6년 전에 중국에서 같이 근무한 동료이다. 한국으로 들어와서 울산에 살고 있는 K와는 가끔씩 전화 통화를 하며, 이런저런 속마음을 나누었지만 막상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난겨울, 긴 통화를 하며 올해는 시간과 여건이 허락하면 얼굴 한 번 보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생각나 K에게 이번 여름에 시간이 되는지 연락을 했다.
다행히 K도 시간이 된다고 답이 왔고, 그리하여 6년 반 만에 성사된 K와의 약속. 만나는 장소는 내가 묵는 숙소 근처인 서면 롯데백화점 본점. 그녀와 점심을 먹기로 해서 일부러 아침에 출발하는 기차를 탔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부랴부랴 롯데백화점으로 가니 정오가 가까운 시간. 먼저 도착해서 쇼핑을 하고 있다는 K가 내려올만한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중국에서 근무할 때에 비해 우리는 모두 나이를 한참 더 먹었지만, 다행히 서로를 알아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살이 찐 나와 달리 K는 전보다 훨씬 마른 모습이었다. 심지어 흰머리조차 한 가닥 없는 검은 머릿결과 홀쭉한 얼굴은 전에 비해 어려 보이기까지 했다.
"우와~ 샘! 잘 지냈어요? 이게 정말 얼마만이에요?"
"그러게요. 샘도 잘 지냈죠? 너무 반가워요!"
가끔씩 긴 통화를 하면서 속 이야기를 나누었던지라 오랜만의 만남에도 우리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K와 나는 각자 근처의 식당을 알아왔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각자 찾은 1순위의 식당도 일치했다. 어렸을 때에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을 좋아했지만, 이제 나이가 드니 반찬이 푸짐하게 잘 나오는 한식집을 선호하게 되었다. 우리는 쌈 정식 집에서 각각 순두부와 된장 쌈 정식을 주문했다. 쌈과 잡채, 샐러드, 고등어조림 등 정갈하게 나온 반찬이 맛도 좋았다. 누룽지까지 나와서 양도 많은데, 가격도 괜찮아 가성비 있는 맛집이었다. K는 내 느린 식사 속도를 아는 지라 우리는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 있게 식사를 했다. 홀 자리가 꽉 차서 안쪽 방에서 먹었는데, 문을 닫을 수 있어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각자 다니는 병원 이야기, 건강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긴 시간 대화가 이어졌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롯데백화점으로 들어와 공차를 테이크아웃해서 백화점 지하에 테이블이 있는 공간으로 갔다. 사람들이 많아서 눈치 작전 끝에 아담한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자리를 겨우 맡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오래전 제자한테 갑자기 연락이 와서 울산 올 일이 있는데 잠깐 볼 수 있냐고 하더라고요. 근데 뜬금없이 왜 보자는 건지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왜 불안해요?"
"요즘 세상이 참 흉흉하고, 예전과는 많이 다르잖아요. 오래전 제자가 찾아와서 담임 선생님을 흉기로 찔렀다는 그런 기사를 봤던 것도 생각나고... 물론 그 아이는 대학교 입학 했을 때나 군대 갈 때, 제대할 때처럼 인생의 전환점이 있을 때 가끔씩 연락하던 제자인데, 왜 유독 이번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마음이 그랬어요."
"그래서, 만났어요?"
"네. 딱히 못 만날 핑계를 대기도 그렇고 해서 만났어요. 울산 터미널로 온다고 해서 내가 차를 갖고 가서 픽업해서 같이 이동해서 차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회사 일로 울산에 올 일이 있어 내려왔는데, 두세 시간 여유가 있었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생각나서 보자고 했던 거였더라고요. 제자랑 얘기를 나누고 다시 차로 데려다주는데, 순간 내가 왜 이 아이의 연락에 불안했나 혼자 속으로 웃었어요. 물론 어엿한 30대 청년이 되어 무슨 마음을 먹었다면 힘으로는 내가 당해내지 못하겠지만, 정말 순수하게 오래전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서 연락한 애한테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을까 싶더라고요."
"그게 요즘 현실이니까요..."
"사실 얼마 전에 아는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거든요."
"본인 부고요?"
"네. 학교에서 선생님 부모님의 부고는 흔히 접해도 당사자 부고를 접할 일은 많지 않잖아요. 그 선생님이 이제 갓 서른 정도 됐을 거예요."
"아니, 근데 왜...?"
"알고 보니 어느 중학교에서 근무하는 중에 무고하게 아동학대 신고를 당했나 봐요. 경찰 조사도 받고, 교육청 조사도 받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조사받으면서 많이 힘들었나 봐요."
"그럼, 스스로...?"
"네... 그랬다 하더라고요. 몇 년 전에 같은 학교에서 기간제로 근무했던 샘이었는데, 다음 해 2월에 임용고시에 최종합격했다고 해서 교무실에서 좋아서 펑펑 울었던 그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나거든요. 그래서 같이 있던 샘들이 손뼉 쳐 주면서 엄청 축하해 줬었거든요. 기간제 할 때도 엄청 열심히 수업하던 선생님이었는데, 그런 일을 겪으면서 수치스럽고 억울했겠죠. "
"새옹지마네요. 그 축하할 일이 오히려..."
"그러게요. 그 샘이 차라리 임용에 안 붙었다면 어땠을까, 그 중학교에 발령받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암튼 그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나서 그랬는지, 옛 제자의 순수한 연락마저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는 한참 동안 녹록지 않은 학교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무엇보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지내자고, 그리고 또 반가운 모습으로 보자고 따뜻한 포옹을 나누고 헤어졌다.
K와 헤어지고, 혼자 광안리 해변으로 갔다. 반짝이는 광안 대교의 불빛과 수많은 요트에서 뿜어내는 폭죽의 향연을 보면서도 야경의 아름다움이 오롯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 한 켠의 스산하고 쓸쓸함이 검은 파도와 함께 밀려 와 슬프고도 서러웠다.
며칠 전 도서관에 예약도서로 신청한 백수린의 소설 "눈부신 안부"가 도착했다는 알림 문자가 왔다. 부산에서 만난 K가 최근에 재미있게 읽었다며 추천해 준 책이었다. K와 나는 각자 읽은 책을 추천하기도 하고, 서로 무슨 책을 읽는지 가끔씩 묻곤 했다. 그날 오랜만에 만나는 K에게 오은 시인의 친필 사인을 받은 책 "초록을 입고"를 선물로 건넸더니 K가 너무 좋아했다.
부산에서 돌아와서 동네 도서관에 가서 "눈부신 안부"를 검색해 보니 8월 중순까지 대출 중이었다. 할 수 없이 예약 신청을 하고 거의 열흘 만에 온 연락이었다. 오늘 대출하고 아직 읽지 않아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은 제목부터 그냥 마음에 든다. K를 비롯하여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오래도록 '다정하고도 눈부신 안부'를 전하며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지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