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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향 Feb 27. 2022

도예인을 키우는 특성화고등학교 이야기

내 청춘을 불태웠던 30대 시절

  몇 년 전에 도예가를 키우는 국내 유일의 특성화고등학교에서 4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다. 전국 단위로 학생을 모집해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교였다. 한 학년에 3학급씩 전체 9개 학급인 소규모학교라서 그만큼 교사의 업무 강도는 엄청 났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일당 백 이상의 업무를 담당하면서도 아이들을 위해 하나라도 더 해주려고 일을 만드는 학교 분위기였다. 그런 선생님들의 마음과 헌신에 힘입어 아이들은 처음 입학했을 때와 사뭇 다르게 3년 동안 엄청난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 졸업했다.      


  혁신부장을 하면서 연말에 전교직원을 대상으로 1박2일 동안 교육과정 워크숍을 진행했던 적이 있다. 다음 해의 교육과정을 구상하면서 전 교직원들이 업무간소화에 대한 협의를 했다. 없애도 되거나 줄여야 할 업무에 대해 논의하는 게 핵심이었는데, 긴 시간 회의 끝에 결국엔 어떤 업무도 없애지 못했다. 이유는 교사들이 힘들더라도 아이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교육활동이니까.

  학교에서 진행하는 수많은 행사나 활동이 결국에는 학생부에 기록이 되고, 그 내용은 대입 수시에서 굉장히 크게 작용하기에 선생님들이 조금 더 고생하더라도 아이들을 위해 모두들 계속 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교감 선생님은 업무 줄이라는 회의에서 오히려 계속 하겠다는 선생님들은 우리 학교 선생님들밖에 없을 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도예 특성화학교라서 도예인이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온 아이들도 있었지만, 어떤 아이들은 공부가 싫다는 이유로 인문계 고등학교로 가고 싶지 않아서 별 생각없이 온 아이들도 있었다. 도예 명장 가문의 자제나 부모님들 중에 도예를 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집안의 아이들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부모의 돌봄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열악한 가정의 아이들도 많았다. 경제적인 차이만이 아니라 학교 생활에 대한 아이들의 의지와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니 학생들의 편차는 컸다.

  선생님들은 이 아이들을 모두 이끌어나가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만 했다. 사고치는 아이들을 다독이고 학교 생활을 잘 적응해 나가도록 돕는 과정에서 지칠 때도 많았지만, 아이들이 서서히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끼며 힘을 얻었다.


  “흙에는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만져주는 치유의 힘이 있어요.”

  어느 도예 전공 선생님이 말했다. 흙을 만지는 아이들은 성품이 온유하게 바뀌게 된다며, 천천히 아이들을 기다려 고 했다. 흙이 주는 치유의 힘과 선생님들의 아이들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과 헌신으로 아이들은 점점 변화했다.      


  장작가마 불지피기 행사, 청소년 비즈쿨 페스티벌, 도자기 축제 부스 운영, 학부모와 함께하는 식기 디자인 공모전, 명장 공방, 협동조합 매점 운영, 도자문화 탐사대, 비즈쿨 창업, 사제동행 산행, 토담제, 졸업 전시회 등 우리 학교만의 특색있는 수많은 교육 활동은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 주었고, 아이들은 3년간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관계도 남달랐다. 한 반에 25명 정도였고, 전교생이 300명이 안 되었기에 선생님들은 아이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았다. 선생님들은 밤늦게까지 각종 교육활동을 이어나가고, 아이들을 위해 개인적인 시간을 기꺼이 내 주곤 했다.


  나 역시 고3 부장을 하면서 저녁 늦게까지 수시 입시를 위한 특별 지도를 담당했다. 특성화고등학교이지만 도예 분야는 고등학교 졸업장으로 취업을 할만 한 곳이 드물었고, 도예가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교에 진학하여 전문적인 교육을 계속 받아야만 했다. 도예과 진학은 수시 전형 위주였기에 아이들은 수시를 위한 자소서나 실기 준비에 매진했다. 자소서나 면접 등 개인별 지도를 하다보면 9시 30분에 끝나는 수업이 10시 30이 훌쩍 넘어서 끝나기 일쑤였다.    

  

  출퇴근 거리가 50Km가 넘어 고속도로로 1시간씩 운전하다가 깜빡 졸음운전을 한 적도 많다. 이른 아침과 밤늦은 시간에 출퇴근을 하면서 이러다가는 큰 일 날 수 있겠구나 싶어서 몇 달 만에 나는 기숙사에 남은 방을 얻어 들어갔다. 일 주일에 3일 정도는 학교 기숙사에서 잤다. 본교 교사가 기숙사에서 자는 것에 대해 기숙사 담당 부장과 관리자들은 내심 좋아했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있지만, 기숙사에서 혹시라도 늦은 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대처해 줄 교사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든든하게 여겼다.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다른 학교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아이들과의 특별한 추억이 많이 쌓였다. 그 전에는 기숙사에서 자는 선생님이 한 명도 없었기에 자신들처럼 기숙사 생활을 하는 나에게 아이들은 동질감을 느끼고 친근하게 여겼다. 밤늦게 모든 교육활동이 끝나면 아이들은 내가 있는 도서관으로 찾아오곤 했다. “선생님, 오늘 기숙사로 가실 거죠?”라고 말하며, 내 가방과 짐을 들어주고 팔짱을 끼며 같이 기숙사로 향했다.


  잠옷 바람으로 기숙사 복도를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기숙사로 퇴근하는 나를 보면 아주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 역시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볼 때와 다르게 기숙사에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편안한 차림으로 야식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아이들에게 전보다 정감이 갔다. 세제 같은 게 떨어지면 아이들은 흔쾌히 빌려주기도 하고, 기숙사 생활에 대한 안내와 특별 야식 조리법 등 기숙사 생활의 이모저모를 신이 나서 설명해 주기도 했다.    

  

  나의 기숙사 입방을 환영하는 의미로 자신들의 방에 초대하기도 했다. 초코파이로 쌓은  케이크에 초를 켜고, 간단한 과자와 아이들이 직접 만든 다기에 차를 우려내어 다과까지 준비해 주었다. 다과 테이블을 가운데두고 둥글게 앉아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마치 대학교 때 MT 가서 모닥불 앞에 두고 노래하던 것과 같은 감성어린 분위기에 가슴이 촉촉해졌다. 가끔은 내 기숙사 방 앞 신발장에 쪽지와 함께 비타민 음료나 초콜릿을 두고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4년간의 시간 동안 아이들과 색다르고 즐거운 추억을 많이 쌓아가,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의 30대는 감쪽같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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