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상황판에 신호등을 켜다

바쁜 학교에서, 두 번째 이야기

by 은향

올해 근무하는 교무실은 다행히 본교무실이 아닌 별실. 대부분의 학교에서 본교무실은 교감 선생님과 같은 공간에 있어서 불편한 점이 많다. 교감 선생님 자리는 대개 본교무실의 안쪽 끝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별도의 공간이 아니다보니 교무실 안에서 교감 선생님을 신경써야 할 일이 많다. 반면, 별실은 구성원들끼리 마음만 맞다면 더할나위없이 편안한 공간이 된다.


우리 부서 위치는 5층 건물 중 딱 중간인 3층. 부장과 나, 음악 선생님 이렇게 세 명의 책상이 순서대로 쪼르르 놓여 있다. 다행히 우리 셋은 잘 맞는 편이며, 종교도 같고 통하는 게 많아서 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지내고 있다. 학교에 근무하면서 이렇게 잘 통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료들과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며 감사한 일이다.


서로 좋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작은 것에서부터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그래서 얼마 전에 우리 교무실에는 각자의 자리에 일명 "마음 상황판"을 붙여 놓았다. 마음 상황판에는 신호등처럼 빨강, 노랑, 초록으로 마음의 여유 상태를 표시하도록 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으니 절대 말을 걸지 말았으면 좋겠을 때는 빨간색으로, 지금 무언가 할 일이 있지만 말을 건넸을 때 대꾸할 정도의 여유가 있을 때는 노란색으로, 지금은 딱히 바쁜 일이 있지 않아서 언제든지 대화할 수 있고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는 초록색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왼쪽은 부장님 자리 파티션 위에 놓인 마음 상황판. 오른쪽은 내 자리에 놓인 마음 상황판.)


사실 이런 마음 상황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1학기 때부터 종종 있었다. 학습지 제작이나 업무 처리 등으로 집중해야 할 때, 옆자리 음악 선생님이 건네는 말에 일일이 대응을 해 드리다보니 하던 일의 흐름이 뚝뚝 끊겨 진행 속도도 더디고, 공강 시간을 많이 까먹게 되었다. 그런 날은 퇴근하면서 여지없이 노트북과 일거리를 챙겨가야만 했고, 주말에도 집에서 편하게 쉴 수가 없었다.


음악 샘은 자신이 주요 교과가 아닌, 음악 전공이라서 50넘어서도 큰 어려움 없이 다닐 수 있다며, "하나님 땡큐!"라고 말하곤 하신다. 아무래도 지필평가도 없고, 수업 준비에 쏟는 시간이 일명 주요교과를 담당하는 부장이나 나와는 확연히 달랐다. 연배가 있으시다보니 학기초 부서 업무 분장에서도 배려를 해 드렸고, 그러다보니 우리 교무실에서 가장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음악 샘이 혼잣말인지 대화인지 모를 말을 내뱉을 때도 많아서 그때마다 대꾸를 해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살짝 고민이 될 때도 있었다.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다행히 마음 따뜻한 우리 부장이 가운데 자리에 앉은 나를 건너뛰어 끝자리에 앉은 음악샘의 혼잣말에 자주 응대를 해주어 나는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을 때도 종종 있다.


물론 음악 선생님은 좋은 분이시고,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 속에서 공감하며 유대감을 느낄 때도 많았다. 하지만, 때로는 굳이 내가 듣고 싶지 않거나 알고 싶지 않은 사소한 것들에 대해 50분 가까이 듣고 있을 때면, 해야 할 일 때문에 조바심이 나고 불편하기도 했다. 신이 나서 하는 상대의 말을 적당한 타이밍에 자르는 것은 늘 어려웠다. 잘못하면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거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쾌하게 대화를 끊을만큼의 재치와 순발력이 나에겐 없었다.


언젠가부터 정말 급하게 할 일이 많을 때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의미없는 말의 노크에 더이상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 나름 애썼지만, 긴 머리에 가려진 이어폰은 티가 팍 나지 않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오히려 내가 가끔 부장한테 말을 거는 것이 바쁜 부장의 소중한 시간을 뺏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실에서 가장 업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 많고 바쁜 사람은 부장이다. 일의 양과 시간적 여유를 피라미드 구조로 보면, 부장이 가장 아래에, 나는 중간 쯤에, 음악 샘은 꼭대기에 있다. 먹이사슬 관계의 포식자처럼, 음악 샘이 내 시간을 앗아갔듯이 나는 부장의 상황을 헤아리지 못하고 부장의 공강 시간을 뺏었지 않았나 싶은 때가 몇 번 있었다. 배려심 많고 소심한 부장은 난감했을 것 같다.


남을 탓할 게 아니었다. 나역시 부장의 상황을 헤아리지 못해 불편하게 만들었을 수 있겠구나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생각 끝에 두 분한테 "마음 상황판"을 제안했다. 부장님도 내심 좋았는지 반색하는 표정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음악 선생님도 별다르게 생각하지는 않으셨다. 쇠뿔도 단김에 빼는 법. 바쁜 날이었지만 마음 상황판과 마음 신호등을 급히 만들고, 컬러 프린터가 있는 상담실에 가서 출력하고, 도서실에 가서 코팅까지 해 왔다. 손이 다치지 않게 뾰족한 모서리 부분까지 둥글게 오려서 나누어 드렸다.


아직 시행한 지 며칠되지 않았지만, 일단 만족하고 있다. 부장님한테 말을 건네기 전에 부장님 파티션 위에 놓인 마음 상황판의 신호등을 먼저 살펴볼 수 있어 참 좋다. 최소한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2학기에 새로 오신 교감 선생님이 자꾸 없던 일을 계속 만들어대서 부장님은 쓸데없는 문서 작업을 하느라 마음 상황판에 한동안 빨간색 신호등이 켜졌었다. 의욕이 넘치는 초임 관리자일수록 교사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뺏는다. 지필평가 출제기간이라 안 그래도 바쁜데, 학교운영위원들에게 매달 부서별 업무 내용 보고자료를 왜 만들라는 건지... 학교교육과정 계획서에는 1년 간의 부서별 교육활동 내용이 다 들어가 있으며, 매달 월중행사표에도 날짜별 업무 진행 내용이 있는데 말이다. 깐깐해서 교사들을 피곤하게 했던 전 교감님이 막 좋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교사들 사이에서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오늘에서야 부장 자리의 마음 상황판 불빛이 겨우 노란 색으로 바뀐 것을 확인했다. 음악 선생님의 상황판에는 늘 파란색 신호등이 켜져있고, 내 마음 상황판은 빨간색과 노란색 신호등을 오가고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우리 셋 모두의 마음 상황판에 파란색 신호등이 켜질 때가 오긴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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