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심리적 안전지대

P를 그리워하며

by 은향

학창시절 친구가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았다.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 정도의 친구들이 적당히 있었다. 쉬는 시간에 모여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거나, 체육이나 음악 시간처럼 교실을 이동해야 할 때 기다려서 같이 가거나, 점심을 먹거나, 화장실 같이 가는 친구들이 있어 그다지 외롭지 않고, 소소하게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나와 어울려 함께 노는 친구들은 공교롭게 홀수일 때가 많았다. 3명 혹은 5명이 어울리다보니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갈 때면, 남모르게 속앓이를 했다. 우리는 관광버스 맨 뒷 좌석에 앉을 정도로 학급에서 목소리가 크거나 영향력 있는 무리는 아니었기에 누군가가 혼자 앉아야만 했다. 관광버스에 오르기 전 운동장에서 둘씩 짝을 서 있어야 할 때부터 우리 무리 속에서 은근한 눈치 게임이 시작되었다.


친구들과 불편해지기 싫어서 내가 먼저 쿨하게 너희끼리 앉으라고 양보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른 혼자 있는 친구와 급히 짝을 이루어 앉았었다. 겉으로는 내가 양보한 모양새였지만,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두 명!' 게임 진행자가 외치는 숫자에 같이 있던 친구들과 떨어져서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 느꼈던 뻘쭘하고 민망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말은 안 했지만 무리 속에서 암묵적으로 서로의 짝지가 누군지는 다들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고3 때 모든 친구들이 인정하는 나의 '짝지'인 P가 있어 힘든 수험생 시절이었지만 즐겁고 행복했다. P는 나처럼 밥 먹는 속도가 느려서 우리는 매일 2,3교시 쉬는 시간부터 미리 조금씩 도시락을 먹어 두었다. 그래야만 점심 시간에 다른 친구들 무리와 비슷하게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 자주 교실에 들러 우리를 살펴보는 담임 샘도 매일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는 우리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밥 맛있게 먹으라고 웃으면서 지나가시곤 했다.


야자를 끝내고 기숙사 점호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화장실에 모여 수다를 떨기도 했고, P가 부는 리코더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하기도 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불안한 미래에 토로하기도 하고, 서로의 꿈을 응원해 주기도 했다.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토요일에도 우리는 학교에 남아 서로 부족한 공부를 도와주었다. P는 나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쳐 주었고, 나는 P에게 문학 작품 해석을 해 주기도 했다. P는 내가 설명해 주면 어려운 시도 이해가 쏙쏙 된다고 나를 치켜세웠다.


P는 나에게 일종의 심리적 안전지대가 되어 주었다. 함께 마음을 나누고 든든하게 지지해 주는 P가 있었기에 고3인데도 학교 생활이 평안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해서도 P를 비롯하여 친하게 지냈던 고3 친구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어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고3 시절 담임 선생님을 가끔씩 찾아뵙기도 했다. 30대가 되고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돌잔치를 하는 등 인생의 큰 관문을 넘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제법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다. 결혼한 친구들이 모임에 아이를 데리고 나와야만 하는 처지가 되자 아이들 뒤치닥거리 하느라 주객이 전도되어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우리는 10년 넘게 지속해 온 정기적인 모임은 끝내고, 가끔씩 연락만 주고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P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는 말만 하고 우리 모두와 연락을 끊었다. 무슨 일이 있는건지 걱정도 되고 궁금했지만, 섣부르게 그 사정을 들추어내지 않고 우리는 P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P가 가끔씩 그리울 때가 있다. 발이 빠른 P는 달리기를 잘해서 체육대회 때 우리반 선수로 뽑혔었다. 뒤처지던 상황에서 P가 주자로 나서면, 역전을 해서 P는 우리반을 승리로 이끌었다. 친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개선장군처럼 응원석으로 들어 온 P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로 앉으면, P의 '짝지'인 내가 괜히 덩달아 우쭐한 마음이 들었었다.


P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직도 대학병원 간호사로 지내고 있을까. 요즘도 영어 공부를 계속하고 있을까.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