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인생
책이라고는 교과서와 문제집만 보고 살았던 팍팍한 고등학교 시절, 국어책에서 얼핏 보았던 법정의 '무소유'라는 짧은 글이 너무나 생소해서 퍽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내 주변에서 '돈' 때문에 펼쳐졌던 숱한 아픔들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무엇도 갖지 않겠다던 그의 가슴에는 무엇을 갖고 있었을까? 이 작은 물음이 씨앗이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무섭게 그가 남긴 글들을 찾아 읽었다. 당시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날보고 '괴짜'라 했다. 괴짜의 관심은 자연스레 경전으로 흘러갔다. 숭산의 글에 큰 덕을 보았다. 그의 안경 -해석- 으로 경전을 읽었고, 당시 나의 생각을 교류했던 승려들로부터 여러 권유를 받기도 했다. 정말 속세를 떠나 살아야 하나? 이젠 더이상 결정을 늦추면 안되겠다 마음먹을 찰나, 또 다른 사건을 만났다.
잘 곳이 없어 길에서 자고, 무료급식소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이들을 보았고, 그들을 돕는 이들을 만났다. 그 사건이 그동안 쌓아올린 관념의 울타리를 깨부수고 삶으로 내려오게 했다. 그 길로 무작정 집을 떠났고, 그들과 함께 살며 밥을 지었다. 그들의 몸에서 악취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찌푸릴 수밖에 없었던 속된 마음 돌아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행패를 부리는 이에게 맞기만 하는 밥돌이 아저씨가 너무 안쓰러워 그를 거칠게 밀쳐버리곤 뒤늦게 밀려오는 후회에 젖어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나를 지탱했던 어떤 관념도 이 순간을 돕지 못했다. 난 어쩔 수 없는 속세의 중생이었다.
어쩌다 공동체로 사는 이들을 만났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건만 결국 손바닥 위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거듭 확인한 내 앞에, 그들은 서로 기대어 일상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당시 혼인을 앞둔 옆지기와 함께 그들이 사는 동네를 둘러보며, 참 딴 세상같다며 놀란 기억이 있다. 매실청과 완두콩을 간식으로 먹는 아이들은 여느 아이들과 달리 차분하고 진지해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혼인과 함께 이들 곁에 둥지를 틀었다.
늦깍이로 들어간 신학교에서 많은 선생을 만났다. 그보다 더 많은 선배들을 책으로 만났다.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분명하다 여겨온 것들이 흐릿해지는 경험을 했다. 어느 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누구를 더이상 스승이나 선생으로 두지 않게 되었다. 신조차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자, 비로소 내가 '다시' 보였다. 더이상 다른 누구를 종교의 언어로 가르칠 수 없어서 설교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돌고 돌아 다시 첫 자리로 돌아왔다. 나를 새로운 세계로 발딛게 했던 법정의 글을 다시 읽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뜻이다'라는 문장이 새롭게 다가온다. 어쩌다 내 곁에 있는 옆지기와 아이들. 그들은 내게 찾아온 축복이자, 숙명의 굴레이다. 그들에게 울타리가 되어주는 게 내게 마지막 남은 역할이자 책임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