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

이제는 함께가는 그 길

by 고종구

이제 막 서른 넷이 되던 1월의 겨울, 아무리 꽁꽁 싸매고 나서도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였을까? 못총을 비롯한 온갖 공구를 쥐어가며 허허벌판에다 집을 짓고, 양계장에서 무거운 사료를 번쩍번쩍 들어가며 닭밥을 챙겨주며, 드넓은 밭에서 끝도없이 이어진 고구마를 캐느라 굳은 살이 마를 날이 없던 손가락 마디는 언제 그랬던 적이나 있었냐는 듯 야들야들해진지 오래였다.



이미 서울살이가 1년이 넘었건만 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밥을 해주고, 늦은 밤 집에와 공부를 하는 일은 여전히 과분하고,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왜 그랬을까? 스물 다섯, 내 인생을 걸고 꼭 일궈보겠다 다짐하고 뛰어들었던 두 곳의 한몸살이(공동체)의 삶에서 적응하지 못했고, 끝내 도망치고 말았다는 자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내겐 월요일이 쉬는 날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하루뿐인, 황금같은 휴일에 어쩌다 성경공부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세상에, 안그래도 매일 보는 걸 쉬는날에도 봐야한다니 너무한거 아닙니까? 입이 대짜로 나온 채로 그곳을 다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바로 맞은편에 지금의 옆지기가 앉은 걸 보고 바로 입이 쑥 들어갔다. 그를 만나기 위해 내가 이 시간을 견뎠나보다...



목청도 컸고 몸쓰는 일이 익숙해서 빠릿했던 나와 달리, 그는 목소리도 정말 여렸고 행동도 느릿느릿해서 마치 '보노보노'같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와선 그와 만날 구실을 찾느라 머리가 바빴다. 나의 갖은(?) 노력으로 회기역의 작은 찻집에서 처음으로 그와 단둘이 앉게 되었다. 그동안 나이 어린 대학생들과 어울리며 배워온 온갖 스몰토크 기술을 총동원했다. 그와 함께 인근 밥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그가 그만 수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순간 머릿 속으론 재빨리 주어드려야 하나, 매너있게 직원에게 수저를 달라고 요청해야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는



"어머, 수저가 떨어졌네요?"



이렇게 말부터 하더니, 이후로도 (내 기준에) 한참 있다 떨어진 수저를 줍고, 차분하게 직원에게 새로운 수저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 모습 속에 늘 숨가쁘게 뛰어왔던 내 일상이 돌아봐지며, 사뭇 여유로운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 느껴졌다.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인근 대학 교정을 거닐었다. 교정을 거닐며 조심스레 내가 처음 개신교의 울타리로 들어왔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런 주제는 너무 오랜만이라 쑥쓰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날 향한 차분하고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준비한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갔다. 한시간 가량의 간증(?)이 끝나고, 대학교 정문을 빠져나오는 길, 이대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 그의 가는 길을 배웅해주어야 겠다고 생각할 찰나,



"저기, 날도 추운데 카페에 들어갈래요?"



그는 학교 앞 2층에 있는 카페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했다. 어, 이거... 그린라이트인가? 금방이라도 뛰어들어가고 싶은 다리를 용케 붙잡으며 그의 걸음에 맞춰 카페에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난 애써 숨겨왔던 진짜 이야기를 곧장 꺼냈다. "아이를 외롭게 키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있어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내가 한 때 평생을 바쳐 일궈보겠다고 다짐했었던, 하지만 결국 실패하여 도망치고 말았던 그 한몸살이의 여정과 끝내 버리지 못한 꿈에 대해서.



우리가 처음 단 둘이 만났던 그 날,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던 때에 어색한 인사를 하고, 시내버스 막차에 간신히 올라타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시 아쉬운 인사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이야기를 나눴고, 이듬해 수많은 하객들 앞에서 남은 여생을 한몸으로 살겠다 서약했다. 그리고 우리의 첫 신혼집으로 한몸살이의 터전 한가운데에 둥지를 틀었다.



난 그렇게 실패했지만, 실패하지 않았다. 여전히 꿈꾸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넷이서 그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그 때 옆지기에게 이 길을 함께가자 손 내밀었던 순간이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지않나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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