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굴과 사랑
두 사람은 종종 다투거나 투닥거리지만 곧잘 어른스럽게 화해하는 편이다. 그래서 다음날까지 전날의 감정을 끌어오지 않는데 이상하게 계속 답답했다. 하루종일 가시지 않는 갑갑함과 불편한 숨.
이럴 때는 매트 위로 올라가야 한다. 주말에는 다니고 있는 요가원이 문을 열지 않아 집에서 좋아하는 요가 선생님의 유튜브 동영상을 틀어놓고 요가를 한다. 후굴(허리를 뒤로 젖히는) 동작이 반복해서 나왔다. 요 며칠 허리가 아팠던 터라 일부러 적게 젖혔다. 허리가 아픈 상태에서 뒤로 가는 게 무섭고 불편하니까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게 젖히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생각보다 많이 젖혀 버렸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편안함은 아마 마음에 공간이 생긴 덕분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이해해야 할 것을 머리로 이해시키려 하다 보면 애를 쓰고 있는 머리가 아니라 도리어 쓰지도 않는 마음이 피로해진다. 그렇게 지쳐 버린 머리는 마음의 공간을 한껏 좁히는데 내게 그 좁혀진 공간을 넓혀주는 아사나들은 대부분 후굴이었다. 그날 동영상에는 후굴 자세에 가슴을 들어 올리는 동작이 있었다. 가슴을 들어 올리니 숨이 들어올 공간이 넓어지고 숨이 한결 편해졌다.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다 마지막 내쉬는 숨에 깨달음이 왔다.
'아. 너무 잘 알면 오히려 두렵구나.'
나는 후굴을 두려워했고 지금도 종종 후굴을 두려워한다. 왜냐면 후굴을 잘 알면서도 뒤가 보이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두려운 이유를 꼭 보이지 않아서라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는 것이 어느 때는 보이지 않는다는 두려움보다는 너무 잘 아는 그 무섭고 불편한 두려움 때문에 보려 하지 않기도 해서이다. 두 사람의 싸움의 원인이 그랬다. 그가 너무 잘 아는 것을 너무 모르는 나. 내가 후굴을 너무 잘 아는 만큼 무섭고 불편해서 보려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도 내가 모르는 그 무언가를 그 혼자만이 너무 잘 알아서 무섭고 불편해서 보이는데도 보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생각이 정리되고 감정이 정돈되면서 때론 그가 하는 몇몇 얘기들은 무겁게 느껴지고 그날은 왜 내가 그렇게까지 뾰족해졌는지도 좀 알 것 같아 그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 언제나 늘처럼 그는 귀 기울여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조금은 날을 세웠던 솔직함에도 조금도 화내지 않는 그의 다정한 노력으로 우리는 대화를 통해 그가 나를 지키고 싶었던 방법과 내가 나 스스로를 지키고 싶은 방법이 달랐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가 더 잘 아는 세상에 관해서는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길 원했고 나는 내가 잘 모르는 세상에 관해서도 나의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 차이가 우리를 싸우게 했고 화해한 후에도 어떤 모양으로 흐리터분하게 남아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가 잠시 괴로웠던 것은 그에게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는 두려움으로 나에게 필요한 시간을 허락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겪지 않았던 사건들과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바라볼 틈도 없이 비집고 들어오는 그의 가치관을 정리하고 수용하고 수용된 그의 가치관과 나의 가치관과 별개로 우리의 가치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과 불러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생각들이 정리된 후 새로 생길 아는 두려움에 대해서 파악하고 바라보고 받아들일 시간도 필요했다. 그는 내게 그 시간을 허락했고 나 또한 그를 더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약속했다.
요가는 후굴 아사나를 통해 우리의 엇갈림을 극복할 지혜를 알려주었다. 그건 후굴 아사나를 완성시킬 때처럼 인생에서도 아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왜 뻔히 아프고 불편한 걸 알면서도 후굴 아사나를 하는 걸까? 다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랑해서이다. 무엇보다 자신 있게 요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인생에서 아는 두려움을 만났을 때 이기고 싶은 힘도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