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걸이와 요가
새벽에 일어나 요가를 하러 가려고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는데 늘 끼고 있는 링 귀걸이 한쪽이 보이지 않았다. 몇 년째 끼다 보니 고정하는 부위가 헐거워져 최근 종종 빠지고는 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사라져 있었다. 어제 집에 올 때까지는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분명 집 안 어딘가에는 있을 터인데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몰려오더니 허전함과 섭섭함이 내려앉아 마음이 무거웠다. 새벽 요가를 가는 길의 발걸음은 늘 가벼운데 잃어버린 귀걸이 한 짝에 순식간에 요가원을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매트 위에서는 늘 오늘의 나를 받아들인다. 오늘의 나는 정든 물건을 떠나보내며 작게 애도하는 나. 그 작은 애도 속에서 내가 느낀 상실감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었다. 어떠한 형태를 가진 무언가가 사라지거나 없어지거나 할 때 찾아오는 상실감은 스스로 그 무언가에 부여한 어떠한 의미가 사라지거나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 귀걸이를 20대 중반의 나로 여겼던 것 같다. 그 귀걸이는 20대 중반에 일본에서 살던 당시 대인관계와 업무 스트레스를 받던 내가 내게 주는 ‘선물’이라는 이름의 보상 심리로 샀던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모양이 있는 무언가로 나를 사랑했던 것 같다. 모양이 있는 무언가로 사랑한다는 건 결국 모양이 가진 색이나 각 같은 ‘조건’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랑은 온전할 수가 없다. 조건은 미세하게든 강하게든 외부 환경에 흔들리고 때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색은 바래고 각은 뭉그러진다. 언제까지나 20대 중반일 것만 같았던 때를 지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30대 중반이 된 것처럼.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미뤄둔 집안일을 하고 글을 쓰려고 서재에 들어왔다. 어제오늘 유난히 바람이 세서 문이 쾅쾅 닫혀서 놀랐던 터라 서재 문에 캠핑용 박스를 괴어두었다. 바람이 어찌나 세차던지 괴어둔 캠핑용 박스가 문에서 밀려 나와 있었고 아무 생각 없이 그 앞을 지나다 캠핑용 박스를 발로 차게 됐는데 그 밑에서 잃어버린 귀걸이 한쪽이 나왔다. 반가웠다. 하지만 아침에 밀려들었던 상실감에 비하면 작은 반가움이었다. 반가움은 작았는데 안도감이 컸다. 그 안도감은 지금 나는 더 이상 그때의 불안정한 내가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오는 안도감이었다. 지금 여기 나는 30대 중반이고 한국에 살고 있고 여전히 대인관계와 업무 스트레스를 받지만 더 이상 모양이 있는 무언가로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요가가 내게 온전한 사랑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젠 내게 주는 ‘선물’이 필요할 때는 요가를 한다. 좋아하는 아사나(요가자세)를 하고 좋아하는 향을 피우고 요가 경전을 읽는다. 그 사랑에는 어떠한 ‘조건’도 없어서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때와 시간을 이길 필요조차 없다.
오늘 요가는 내게 귀걸이를 통해 잃어버린 것에서 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람에게는 상실감을 넘어 지나야만 보이는 더 소중한 것이 있는데 그건 진심 혹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