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by 제이미

윤경은 집에서 가까운 미술전시회에 가는 길이다. 하늘과 길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회색빛이다. 거기에 맞춘 듯 윤경의 머릿속도 뿌옇다. 도대체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며 나라는 존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예술가의 길을 걸으며 작품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 열심히 인스타에 올려보지만 자신의 작품을 원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없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출산과정만큼 고통스러운데 나에게만 이쁜 자식 같은 이 그림들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녀는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걷고 있다. 단순하게 살고 싶지만 그게 안 되는 윤경이다. 잿빛거리를 좀비처럼 걸어가는 윤경의 눈에 파란 덩어리가 보인다. 이게 뭐지. 누가 방석을 버렸나. 결벽증이 있는 윤경이 거리에 버려진 걸 만지는 일은 결코 없는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파란 덩어리를 만진다. 물컹. 빈백의자인가. 코발트블루. 윤경이 그림을 그릴 때 블루를 많이 써서 파란색 계열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다.


색이 너무 눈에 띄어서 나도 모르게 만졌나 보네.


무엇인지도 모르는 파란 덩어리가 윤경의 마음을 달래주었는지 한결 기분에 나아져 조금은 가벼운 걸음으로 전시회를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출출해진 윤경은 사과라도 깎아 먹으려고 과도를 들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껍질을 깎는데 갑자기 파란 덩어리가 생각이 나더니 윤경의 머리를 채운다. 따끔. 손가락을 베였다. 피날 정도는 아닌데. 따가운 부위를 눌러본다. 피가. 피가 나는데 파란색이다. 파란색 피가 빨간 사과껍질 위로 뚝뚝 떨어진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 눈에 문제가 있나? 나는 색맹이었나? 색맹인 것도 모르고 그림을 그렸을 리가 없는데. 두려운 마음에 손을 떨며 일단 피가 멈출 때까지 닦아내고 반창고를 붙인 뒤 내과로 향한다. 초조한 마음으로 의사 선생님께 베인 손을 보여준다. 의사는 처음에 감전된 마냥 몸을 떨더니 바로 담담하게 피를 뽑아서 검사를 해보고 문제가 있는지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단, 자신이 문제를 정확하게 알게 될 때까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한다.


당분간 저와 윤경 님 둘만 알고 있는 거예요. 가능하시겠어요? 몇 번의 피검사가 더 있을 수 있어요.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


깊이 생각할 새도 없이 윤경은 알았다고 대답한다. 의사는 본인이 직접 피를 뽑아 윤경의 빨갛지도 파랗지도 않은 애매한 색의 혈액을 튜브에 옮겨 스티커를 붙인다. 자신이 색맹이 아니라는 사실만 확인한 윤경은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상황이 너무 황당하다. 아까 파란 덩어리를 만졌다는 말을 의사한테 안 했구나. 그 덩어리가 방사선이라도 내뿜고 있었나. 윤경은 그 덩어리가 있던 장소에 다시 가보기로 한다. 날씨는 언제 흐렸냐는 듯 개어 맑은 하늘을 보이고 있다. 아까 자신에게 있었던 일이 마치 꿈 같이 다가온다. 예상했던 대로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파란 덩어리가 있었던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꿈이었나. 꿈이었으면 좋겠다.


한 달 동안 윤경은 그 병원에서 세 번의 피검사를 했지만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말만 듣는다. 윤경은 자신이 왜 이 의사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민감한 날이 다가오고 있어 더욱 걱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팬티에 파란피가 묻어난다. 생리대를 휴지에 두세 겹 말아 파란혈이 보이지 않게 검은 봉지에 담은 뒤 종량제봉투가 채워지기도 전에 갖다 버린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토록 숨기려고 하는 걸까. 윤경은 다시 의사를 찾아간다.


잘 들어요 윤경 씨. 지금은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실험대상으로 살기 싫으면 내 말 들으세요. 당신이 대학 병원으로 가는 순간 일상 생활 하기는 어려워질 거예요. 내가 당신을 연구소로 보낼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게 두 달째 윤경은 안색이 파래지는 것을 느낀다. 몸은 옷으로 가리고 보이는 곳은 파운데이션을 발라 가려본다. 가끔 보는 엄마와 동생은 알아채지 못한다. 화장 잘 안 하더니 진하게 한다는 말 한마디뿐. 세 달째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소변을 보아도 눈물을 흘려도 파란 물이 나온다. 이를 닦는데 입 속이 파랗다. 주위에는 여행을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 윤경은 집 바닥을 덮을 만큼 큰 전지를 깔고 그 위에 누워 몸에서 모든 액체가 흘러나오도록 둔다. 전지에는 금세 자신의 체액으로 그려진 그림이 완성된다. 그림이 지저분해지기 전에 전지를 갈아주고 다시 그 위에서 생활을 한다. 그렇게 파란 작품들이 윤경의 집 벽을 가득 채운다. 점점 힘이 빠져 그저 종이 속으로 흡수되길 바라는 날 윤경은 작품들과 자신의 모습을 겨우 사진으로 남긴다. 마지막을 예감한 윤경은 사진들을 SNS에 올린 후 파란 덩어리를 만진 뒤의 몸의 변화에 대해 글을 남긴 뒤 종이 위에서 파란 잠에 빠져든다. 그녀의 SNS는 마비가 되고 윤경의 작품은 바로 연구소를 거쳐 박물관으로 옮겨진다. 그 후 사람들은 또 다른 색덩어리를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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