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쏘 1924
요즘은 실질적인 실직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AI가 본격적으로 우리 영역을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냥 적으로 간주하고 배척할 수도 없다.
이미 우리는 AI 없이 일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으니까.
20대에 끝난 줄 알았던 진로 고민을 30대가 되어서 다시 더 심도 있게 하게 되었다.
대 AI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머릿속에 고민을 가득 안고 있던 찰나 홍대 쪽에 약속이 잡혔다. 잘됐다.
홍대랑 상수 쪽에 봐둔 피제리아가 꽤 있다. 간 김에 맛있는 피자나 한 판 먹어야겠다.
네이버 지도앱을 켜면 홍대, 상수, 망원 쪽에 찍어둔 빨간 별표가 압도적으로 많다.
복잡한 고민의 실타래를 푸는 데에는 가장 원초적인 자극이 좋다.
맛있는 음식 혹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입 안에 가득 넣는 것만으로도 그 문제와 잠시 떨어질 수 있다.
여러 빨간 별표를 왔다 갔다 하며 고민하다가 한 군데로 마음을 굳힌다.
방송인 알베르토가 유튜브에서 손키스를 마구 날리며 피자를 먹었던 곳이다.
대부분의 피자 화덕은 구석진 곳이나 주방 안쪽에 숨어 있지만, 이곳은 다르다. 식당 한가운데서 주인공 포스를 활활 뿜어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 모습이 마치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 같다.
원형 주방 덕분에 가게 어디에 자리하든 이올로들이 반죽을 치대고 피자를 화덕으로 밀어 넣는 모습을
모두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주문은 마르게리따가 아닌 '돈 아돌포'.
나폴리 피자 명장인 아돌포의 이름을 따서 개발한 이곳만의 시그니처 메뉴.
(Don은 이탈리아어로 존경과 예우의 의미를 담아 남성 이름 앞에 붙이는 호칭)
돈 아돌포, 즉 '존경하는 아돌포'다.
이름에 리스펙을 넣을 정도면 맛에는 또 얼마나 신경을 썼을지 기대가 된다.
포슬포슬하게 부서지는 감자와 짭조름하고 구수한(?) 소스, 산뜻한 토마토의 산미가
입 안에서 기분 좋게 어우러진다.
매장 한편에 로즈마리 오일과 페퍼 오일이 준비되어 있다. 이것도 따로 스윽 뿌려 맛의 레이어를 쌓아본다.
마지막 크러스트로 접시에 흩뿌려져 있는 오일을 싹-싹 닦아 입 안에 쏘옥.
배부르게 맛있는 피자를 해치우자 문득 깨달음 하나가 전구처럼 탓-하고 들어온다.
AI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이 맛있는 피자를 먹을 수 있을까
AI는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먹는 행위야 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고귀한 일이 아닐까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다. 로봇 팔이 위잉위잉 움직이며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만들고 있었다.
근데 그 아메리카노를 맛보고 평가하는 건 결국 인간이지 않은가.
요리사까지 AI 시스템으로 대체되더라도 그 음식을 먹는 게 유기체인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더 잘 먹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조금 더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미식가가 되어야겠다.
맛집 리스트를 더 확장하고, 낯선 음식에도 도전하며, 계절마다 바뀌는 제철 식재료를 알아가야겠다.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맛있게 즐기는 사람이야 말로 AI와는 차별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