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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 비도 오고 그래서

오찌 나폴리

by 크리잇터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칼퇴를 쟁취해 짝꿍을 만나리라 다짐한 날.

출근길부터 마음은 전투태세다. 새는 시간 없이 착착착- 밀도 있게 일을 해나간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마다. 내린다 내린다 겁줄 때는 자외선만 쟁쟁 내리쬐더니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니 굵어지는 빗방울. 얄밉기도 해라.


하필이면 오늘 입은 옷은 전부 회색이다.

옅은 회색 티셔츠에 진한 회색 슬랙스, 거기에 회색 뉴발란스까지 — 그레이 코어 룩 그 자체.
우산을 썼지만 휘날리는 바람에 빗방울은 그대로 흔적을 남긴다.

옅은 회색은 짙어지고, 짙은 회색은 다크 그레이가 되고, 그레이 뉴발란스는 축축하게 젖어든다.

젖은 옷으로 도착한 곳은 작고 아담한 피제리아.
겉보기엔 소박한 공간이지만, 붉은 벽돌로 지어진 화덕이 주방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곳.
파스타 하나, 피자 하나로 나눠 먹을까 하다가 피자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마르게리따와 콰트로 포르마지 반반 한 판, 그리고 난생 처음 보는 시칠리아나 한 판.

벽에는 늘 보던 나폴리 피자 인증서가 걸려 있고, 한쪽엔 카푸토 밀가루 포대가 잔뜩 쌓여 있다.
이 두 가지가 있는 피제리아라면, 맛은 이미 보장된 거나 다름 없으니 걱정을 접어 넣어둔다.


피자는 금세 나온다. 조그만 촛불을 켜주시고 삼발이 위에 피자를 살포시 올려주신다
마르게리따는 반으로 접어 한입에 쏙. 콰트로 포르마지는 꿀을 듬뿍 찍어 단짠단짠.

그리고 기대했던 시칠리아나.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는 나폴리와는 다르게 수많은 토핑이 올라가 있다. 마치 콤비네이숀 피자 같은 그런

맥시멀리스트 같은 모습이다. 짭짤한 엔초비와 다양한 토핑이 어우러져 각자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제법 괜찮다.


비가 그친 틈을 타 골목길로 나온다.
비 오는 날의 골목은 사람도 적고, 묘하게 조용하며, 살짝은 영화 같은 기분을 준다.

살짝은 가라앉아 있는 이 젖은 분위기, 습기 가득한 낭만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쏟아지는 빗줄기. 마치 참았던 게 터지듯 우두두두, 그러다 쏴아아.
물방울들이 바닥에 튕겨 나가며 안개처럼 퍼지고, 시야 아래쪽이 흐려진다.


그래도 이상하게 기분은 좋다.
걸을 때마다 양말에서 물이 쭉쭉 배어 나오지만,

소중한 내 곰돌이 키링이 흠뻑 젖어버렸지만 그래도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건 꽤 행복하고 의미 있는 일이 맞긴 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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