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케이크 매몰 비용

오타루 르 타오 본점

by 크리잇터

삿포로에서 오타루에 온 건 순전히 앙카케 소바 한 그릇 때문이었다.

그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내고 나니,

나는 자연스럽게 계획 없이 떠도는 여행자가 되어버렸다.

살짝 감기 기운도 도는 것 같아 그냥 돌아갈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오타루에 오겠나 싶어 오늘 하루는 오타루에 있어보기로 한다.


평소엔 남들 따라 하는 걸 일부러라도 피하는 편인데,

오늘만큼은 관광객 무리에 살짝 편입하기로 한다.

다수가 움직이는 방향을 이정표 삼아, 계획표 삼아 따라가는 것이다.

그들의 뒷꽁무니를 쫓아 유리 공예샵도 기웃거려보고,

르 타오 카페 앞에서 하얀 소프트아이스크림도 한 입 베어 문다.

증기를 뿜는 시계탑 앞에서 사진도 괜히 한 장 찍어보고, 오르골당에서 애꿎은 태엽도 돌려본다.

그렇게 1시간 반을 제법 알차게 채웠다.


이제 무얼 해야 하나. 아니, 무얼 하기 전에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그 생각이 발을 멈추게 했고, 관광객들이 제일 많은 르 타오 본점으로 들어가 대기표를 받는다.

내 순서가 언제 될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대기표를 받은 당당한 '예비 손님' 자격을 얻었으니

구석진 대기석 의자 하나를 차지 한다.

그 순간 깜빡 잊고 있던 감기 기운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더니, 깜빡 잠이 들었다.

깜빡은 무슨. 눈을 떠보니 1시간이 지나있었다.

옆에서 기다리던 여고생들도, 앞에 있던 외국인 커플도 이미 사라지고 난 뒤다.

부랴부랴 대기번호를 확인해본다. 제법 줄어있다.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1시간을 기다렸으니, 조금 더 버텨보기로 한다.

그렇게 1시간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조그만 1인용 테이블 앞에 겨우 앉을 수 있었다.

짐 놓을 데도 마땅치 않고, 어째 대기석보다 더 불편한 것 같다.


케이크 2개와 차 한 잔이 나오는 세트를 시킨다.

조리가 따로 필요 없는 제품이라 주문과 거의 동시에 앞에 놓인다.

녹진하다. 입 안에 짙은 밀도를 남기며 스윽 녹아버린다. 여운이 깊다.

그 여운에 멈추지 않는 포크질, 그렇게 10분 만에 사라지는 야속한 케이크.

남들은 치즈케이크를 대화 안주 삼아 '떼어' 먹지만, 나는 퍼먹었으니 속도 차이가 날 수밖에.

2시간을 기다렸는데 10분 만에 일어나야 한다니. 뭔가 손해를 보는 느낌이다.

이렇게 나갈 순 없다. 라즈베리 무스가 들어 있는 케이크를 하나 더 시킨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새콤달콤한 무스 케이크.

분명 맛은 있는데, 당최 그 맛과 감동이 미뢰에서 뇌의 신경세포까지 이어지질 않는다.

어딘가에서 툭, 끊기는 느낌. 그제야 깨닫는다.

매몰 비용의 오류.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 이것저것 덧붙이다가, 오히려 더 찜찜해진 것이다.

그 찜찜함을 4만 원짜리 영수증으로 정산하고 르 타오 본점을 나선다.

밖은 벌써 어둑어둑하다. 잃어버린 게 돈만은 아닌 것 같다.

노을 지는 오타루 운하가 예쁘긴 했다. 분명히 예뻤다. 그런데 어째 마음 한 켠이 내내 무겁다.

아마 마지막에 억지로 욱여넣은 초코 무스가 어딘가에 아직 걸려 있는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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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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