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하늘 아래

선발대로 떠나는 여행. 마지막 날

by 느루숨

이른 작별의 발걸음


아침 7시, 숙소를 나선다. 창밖 하늘은 흐리고, 마음속엔 담담한 기운이 맴돈다. 며칠을 머물렀던 이 도시와의 작별이 멀지 않았다. 숙소인 Moxy Sydney Airport의 로비는 공항 인근 숙소답게 이른 아침부터 체크아웃을 서두르는 투숙객들과 아침 식사를 하는 이들로 붐빈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7시 22분, 공항을 앞두고 잠시 교통 체증이 있었지만 시드니 국제공항에는 무사히 도착한다. 가성비를 앞세운 항공권은 일정을 자유롭게 정할 수 없다는 제약이 따르지만, 그 또한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마지막 일정의 시작점에 선다. 공항은 여전히 분주하지만, 나는 그 분주함 속에서 한 걸음 멈춘다. 면세점에서는 기념품을 고르던 중 한국인 점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는다. 호주 특산품인 T2 티 세트와 코알라 키링, Paw Paw 크림 등을 할인 혜택과 함께 구입하고, 작지만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친다. 기념품들이 하나둘 가방 속에 들어가며, 여행이 끝나간다는 실감이 서서히 밀려온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들고 지난 며칠간의 여정을 조용히 되새겨본다.




하늘 위에서 마주한 여운


OZ602편 항공기는 예정 시각보다 약 40분 늦게 이륙한다. 흐린 날씨 탓에 비행기는 이륙하자마자 구름을 뚫고 상승한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회색 하늘은 여행의 끝자락을 조용히 감싼다. 오픈 런을 하여 48시간 전 예약해 둔 비상구열 정중앙 좌석 E30은 다리를 쭉 뻗어도 엄지발가락이 겨우 닿을 만큼 넉넉하다. 짐을 정리하던 중 승무원이 다가와 양옆 좌석이 비어 있으니 마음껏 편하게 사용하라며 미소를 건넨다. 뜻밖의 행운 덕분에 세 자리를 독차지한 채, 넷플릭스에 저장해 둔 영화를 재생한다. 화면을 바라보다 어느새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기내식은 특별하진 않지만 속을 편히 채워주는 따뜻함이 있고, 조용한 분위기와 텅 빈 좌석의 여백은 마음까지 넉넉하게 만든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고요하게 흘러가고, 그 속에 지난 여정의 기억들이 하나둘 되살아난다. 마치 파노라마처럼, 여행의 장면들이 천천히 마음을 스친다.




익숙함의 품으로 돌아와


오후 7시 50분,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에 도착한다. 한국의 공기는 더 차갑고, 공항의 공기는 익숙하다. 도착장을 나서는 순간, 한 걸음마다 현실이 밀려온다. 수하물을 찾고, 발레파킹 구역에서 차를 인수받는다. 시드니의 밤거리를 거닐던 내 걸음은 이제 인천대교의 도로 위를 달린다. 익숙한 도로 표지판, 뿌연 불빛, 바삐 오가는 차량들. 여행의 끝은 언제나 다시 일상의 시작을 뜻한다.




따뜻한 식탁에서 마무리하는 여정


밤 9시 반, 집에 도착한다.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향기가 반긴다. 식탁 위엔 아내가 미리 준비해 둔 얼큰한 해물찜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다. 따뜻한 밥 한 술과 국물 한입이 몸과 마음을 동시에 녹인다. 여행 중 매일 저녁 영상통화로 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눴던 덕분인지, 긴 공백의 서먹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내는 말없이 그릇을 내어주고, 나는 그 조용한 환대를 미소로 답한다. 식사를 하며 멀리 떠났던 여정을 간단히 전하자, 아내는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그제야 밀려든다. 여행의 끝은 도착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데 있다는 걸 되새긴다. 그렇게, 시드니에서의 여섯 번째 날, 그리고 여정 전체가 따뜻한 식탁 위에서 조용히 마무리된다.





에필로그 — 다시, 시작점으로


하루의 끝에서 바라본 오페라하우스는 낮의 그 얼굴과 전혀 다르다. 유람선 위에서 본 야경은 어딘지 꿈처럼 아득하고, 하버브리지 아래로 흐르는 불빛들은 잔잔한 물결처럼 마음속에 번진다. 그 곁에서 시드니 라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생각한다. 여행의 첫날에도 그랬다. 오페라하우스 아래쪽의 카페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며 시작한 이 여정은, 결국 다시 그 자리에서 마무리된다. 낮의 빛과 밤의 어둠이 겹쳐진 이 도시의 풍경 속에서 나는 어떤 낯섦도 익숙함이 되어 가는 과정을 되짚는다.


늘 함께했던 아내 없이 세 번째 홀로 보낸 여행이었다. 출발 전의 두려움, 혼자 밟는 공항의 바닥, 낯선 도시의 침묵. 그 모든 순간이 이 도시에서 천천히 녹아내렸다. 저녁마다 아내와 영상통화를 하며 잔을 기울일 때마다, 이 여행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멀리 있어도 함께할 수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이 나를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생각한다. 이 여행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새로운 풍경도, 맛있는 음식도 아닌, '혼자 있음'을 견디고 즐길 수 있는 용기였다고. 하지만 그 익숙함이 마냥 편안하지는 않다. 매일 저녁 아내와 영상으로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들이, 오히려 아내 없는 이 시간의 허기를 자각하게 만든다. 혼자 있는 것에 점차 익숙해진다는 것이, 함께여야 한다는 내 삶의 방향을 흔들지는 않을까.


떠나 있는 동안 비운 자리가 크지 않다는 착각은 곧 두려움이 된다. 이 길의 끝에서도 나는 결국 기다림 속에 있다. 아내와 다시 함께 길을 걷기 위한 기다림. 그 기다림이 있기에, 나는 다시 떠날 용기를 품는다. 그러니 이 여행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나는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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