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익숙해진 낯섦과 함께

선발대로 떠나는 여행 5

by 느루숨

흐린 아침, 오래된 대학의 숨결 속으로


호텔을 나서며 부는 바람에 셔츠 깃이 가볍게 흔들렸다. 시드니의 하늘은 구름에 덮여 있었지만, 도시의 하루는 여느 때처럼 또렷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계획 없는 걷기는, 때론 생각보다 많은 것을 남긴다. 오늘도 그런 하루의 시작이었다.


시드니대학교는 정문부터 품격이 있었다. 1850년에 설립된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답게,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대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세계적 연구 성과와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이곳은, 그 명성에 걸맞게 조용한 위엄이 감돌았다. 본관 앞 잔디밭엔 졸업을 마친 듯한 학생들과 가족들이 사진을 남기고 있었고, 나는 그 풍경의 바깥에서 천천히 걸었다. 잔디에 흩어진 낙엽, 석조건물의 중후한 질감, 그리고 하늘을 덮은 구름의 결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정해진 목적지가 없어도 좋았다. 이 순간의 공기 자체가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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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Gallery of New South Wales는 생각보다 깊은 여운을 주는 공간이었다. 입구를 지나자 클래식 음악이 조용히 깔렸고, 방문객들은 속삭이는 듯한 발걸음으로 벽에 걸린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고흐의 초기작품 중의 하나인 '농부의 얼굴', 피카소의 '흔들리는 의자의 누드', 크로드 모네의 '벨일의 구파르 항구', 사소페라토의 '기도하는 성모'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 다양성과 깊이에서 예상치 못한 감동을 받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 미술관의 전시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주기적으로 작품이 교체된다는 설명을 들으며, 나는 그 여유가 부러웠다. 한 도시가 예술을 일상처럼 순환시킬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얼마나 큰 문화적 자산인지 새삼 느껴졌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 나는 벽에 걸린 그림보다도 그 앞에 서 있던 나의 표정을 더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작품과 나 사이에 흐르는 조용한 대화가 오늘 하루를 지탱해 줄 문장이 되었다.

호주5일차_시드니미술관03.jpg 사노 디 피에트로의 '성 제롬, 세례 요한, 베르나르디노,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있는 성모자와 아기 예수'
호주5일차_시드니미술관02.jpg 사소페라토의 '기도하는 성모'


야경에 둘러싸여 만찬을 즐기다


Harbour View Hotel은 원래 숙소였지만, 지금은 숙박 기능을 멈추고 전면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 이유는 객실이 너무 낡고 협소해서 숙소로서의 매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신 식당은 창밖으로 하버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에 자리 잡고 있었고, 나는 그 창가 자리에 앉아 햄버거를 주문했다. 음식의 맛은 평범했지만, 풍경은 비범했다.


Mrs Macquarie’s Chair는 시드니의 대표적인 조망지 중 하나다. 1810년대 초대 총독의 부인 엘리자베스 매쿼리가 이곳에 자주 와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했다는 기록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당시 감옥수들이 바위 일부를 깎아 그녀를 위해 벤치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내가 앉은자리에서 바라본 하버는 그녀가 보았던 것과 같은 방향이었을 것이다. 200여 년의 시간 차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바다는 조용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옆 풀밭 한쪽에서는 인도인으로 보이는 단체 여행객들이 버스에서 내려 자리를 펴고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몇몇은 작은 가스버너 위에 냄비를 올려 조리하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접시에 담긴 음식물을 손으로 꾹꾹 눌러 입에 조심스레 가져갔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소란스럽지 않았고, 서로 조용히 식사에 집중하는 모습이 오히려 경이로웠다.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한 끼를 나누는 장면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따뜻했다. 문화를 달리하면 방식도 다르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날따라 더 깊게 다가왔다.


유람선 디너 크루즈는 이번 여행의 절정이었다. ‘Captain Cook Cruises’의 ‘Harbour Dinner Cruise’를 통해 예약이 가능하며, 가격은 약 130 호주달러. 공식 사이트 등에서 간편하게 예약이 가능하다.

호주5일차_시드니항.jpg 시드니 항

크루즈는 해가 지는 시각에 맞춰 Darling Harbour King St Wharf1에서 출항했다. 선상에 오르자마자 흰 리넨으로 세팅된 테이블과 창가 자리가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와인과 전채 요리가 차례로 제공되었다. 배가 천천히 하버를 돌기 시작하자,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씩 물 위에 내려앉았다. 선상에서 마주한 야경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아름다웠다.


오페라하우스는 황금빛 조명에 감싸인 채 고요한 수면 위에 실루엣을 드리웠고, 주변의 조명은 마치 물결 위에 수놓은 산호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하버브리지는 어둠 속에서도 견고하고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도시의 품을 감쌌다. 다리 위의 조명은 별처럼 반짝이며 펼쳐졌고, 아치 사이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서는 형형색색의 영상이 흐르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 아래로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유람선은 도시와 물빛이 함께 빚어낸 한 편의 영상시처럼 느껴졌다.

호주5일차_오페라하우스야경03.jpg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야경
호주5일차_오페라하우스야경02.jpg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야경
호주5일차_오페라하우스야경.jpg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야경

그 옆으로는 고풍스러운 루나파크가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밤을 밝히고 있었다. 오래된 회전목마와 조형물, 오랜 시간을 견뎌온 놀이기구의 실루엣이 낭만적인 실내등처럼 빛났다. 유년기의 기억 한 조각이 환상처럼 스쳐갔다. 이 조명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시간의 층을 반짝이며 되살리는 매개처럼 느껴졌다.


식사는 세 코스로 구성되어 있었고, 메인 요리는 고기와 해산물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연어 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바삭한 겉면과 촉촉한 속살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진정한 메인은 음식이 아니라 풍경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번져가는 야경은 흘러가는 음악처럼 조용히 가슴을 울렸다. 나는 그 순간을 오래도록 음미했다. 이 여행의 가장 빛나는 밤이었다.




시드니 라거로 여는 시작, 그리고 마무리


크루즈에서 내려 하버브리지를 도보로 건너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다리 위는 생각보다 높았고,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온화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셔츠를 스치고, 발아래 하버는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왼편에는 오페라하우스가, 오른편에는 시내의 불빛이 흩어져 있었다. 다리의 난간 아래쪽엔 투신을 방지하기 위한 철제 구조물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약 100미터 간격으로는 밝은 조끼를 입은 안전요원들이 묵묵히 서 있었다. 치안과 안전을 위해 배치된 그들의 존재가 이 야경 속에서 의외의 안도감을 주었다. 천천히 걷는 동안 마음은 한결 느긋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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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내려온 나는 오페라하우스 아래쪽의 카페테라스에 앉았다.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오페라하우스의 조명이 물 위에 반사되었고, 하버브리지는 그 뒤에서 묵묵히 도심을 지탱하고 있었다. 맥주 한 잔을 주문해 한 모금 마셨다. 시드니 라거 특유의 청량한 첫맛과 입 안에 퍼지는 쌉쌀한 뒷맛이 야경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문득, 여행 첫날 아침 오페라하우스 내부 관람을 기다리며 이곳 테라스에 앉아 마셨던 그 맥주가 떠올랐다. 같은 장소, 같은 맥주지만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그때는 설렘이었고, 지금은 정리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여행은 시드니 라거 한 잔으로 열고 또 한 잔으로 닫는 셈이 되었다. 처음과 끝이 잔 끝에서 가볍게 부딪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지 시원함 때문이 아니었다. 이 도시에 하루하루 쌓여온 감정들과 함께 넘기는 한 모금은, 그 자체로 이 여행의 마지막을 감각적으로 봉인하는 의식 같았다. 나는 맥주가 비워지는 속도보다 느리게 눈앞의 풍경을 마셨다. 이 맥주의 맛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조용한 밤과 찬란한 빛, 그 사이에 서 있는 나의 감정까지 함께 담긴 풍경이었다. 아마 오랫동안 이 맛을 떠올릴 것이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 모든 순간이 차분하게 정리되어 마음속 서랍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밤, 함께할 다음을 기약하며


Circular Quay역에서 Mascot역까지 전철을 타는 시간이나 역에서 내려 숙소까지 걷는 시간이나 같다.

숙소로 돌아온 후, 아내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나는 유람선에서 본 풍경과 다리 위에서 느낀 바람에 대해 조용히 들려주었다. 그녀는 웃으며 내 말을 들었고, 나는 와인 잔을 들어 화면 속 그녀와 원격 건배를 했다.


그러면서 나는 덧붙였다. "당신도 언젠가 꼭 한번 이 밤 유람선을 타야 해.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이거야." 말하면서도 나는 그 순간이 얼마나 귀하고, 이 감정이 얼마나 오래 남을지를 실감하고 있었다.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도시와 물, 빛과 사람의 조화가 만들어낸 시간이었다. 선상에서의 저녁은 단지 식사가 아니라, 삶의 찬란한 한 페이지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꼭 다시 와서 태워줄게. 그때는 오늘의 이 순간보다 더 천천히, 더 오래 머물면서." 마치 유람선을 타기 위해 선발대처럼 내가 먼저 와서 확인한 여정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화면 너머에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표정은 거리와 화면을 넘어 내 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날 밤, 우리는 함께 하나의 약속을 만들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더욱 따뜻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일 저녁엔 얼큰한 해물찜, 부탁해.” 그렇게 오늘이, 그리고 이 여행이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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