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대로 떠나는 여행 4
이른 아침, 숙소를 나서 피더데일 와일드라이프 파크(Featherdale Sydney Wildlife Park)로 향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호주를 대표하는 동물들이 가까이에서 호흡하는 이곳은 예상보다 더 생동감 있었다. 입구에서 받은 지도를 펼치자, 동물별 스탬프를 찍는 칸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각 동물 구역을 찾아다니며, 대표 동물마다 마련된 스탬프를 하나하나 채워간다. 단순한 놀이 같지만, 이 작은 도장은 여행의 흔적이 되어 손끝에 남는다.
코알라와 사진을 찍기 위한 유료 촬영 구역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직접 만지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코알라는 상상보다 작고 순했다. 눈을 게슴츠레 감은 채 나뭇가지를 껴안고 있는 모습은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절묘한 포즈를 연출한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이 여행의 기억은 영원한 정지화면으로 저장된다.
울타리 바깥으로 살금살금 걸어 나오는 왈라비는 마치 공원을 산책하는 이웃처럼 자연스럽다. 관람객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툭툭 튀어나온 귀를 세운 채 자유롭게 길을 오간다. 동물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공간, 그 평화로움 속에서 나는 야생의 숨결을 가까이에서 실감한다.
동물원을 나와 점심을 위해 찾은 East Bank Fish n Chips는 기대 이상의 만족을 안겨준다. 바삭하게 튀겨진 흰 살 생선은 입에서 부드럽게 풀어지고, 감자튀김은 바삭함과 고소함이 조화를 이룬다. 그 맛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감각으로 남는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동안, 바람은 부드럽고, 하늘은 흐리지만 포근하다.
식당 앞 가로수들은 짙은 가을빛을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다 하나둘씩 잎사귀를 떨군다. 잎이 땅에 닿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눈으로 본 그 느린 낙하의 리듬은 계절의 속삭임 같다. 고지대로 올라가며 마주친 사람들의 옷차림은 계절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반팔 옷 위로 점퍼를 덧입고, 목도리를 두른 이들도 종종 보인다. 나무와 사람, 바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이 도시는 느리게, 그러나 정직하게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식사를 마칠 즈음, 핸드폰 알림이 진동을 울린다. 화면엔 고등학교 시절 절친했던 친구의 메시지가 떠 있다. 십여 년 전 호주로 이민 와 지금은 시드니에 정착한 그는, 오늘 저녁 시간이 괜찮다며 반가운 인사를 보내왔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메시지에서 옛 기억이 되살아나고, 식탁 위의 온기와 맞물려 마음이 한결 더 따뜻해진다. 오늘 저녁, 낯선 도시에서 오래된 이름을 다시 부르게 될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점심 식사 후, 스카이웨이와 레일웨이를 타고 블루마운틴 국립공원의 심장부로 들어선다. 케이블카는 수직 절벽을 따라 부드럽게 상승하고, 바닥이 투명한 캐빈 아래로는 협곡의 바위와 원시림이 스쳐 지나간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함과 함께 숲의 숨결이 피부에 와닿는다. 이윽고 레일웨이를 갈아타고 급경사의 철로를 따라 올라가는 여정이 이어진다. 마치 지구의 심장 속으로 진입하는 듯한 느낌이다. 창밖으로는 짙은 초록빛의 유칼립투스 숲이 흐르고, 그 사이사이로 오래된 탄광의 흔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때 광산으로 번성했던 이곳은 수많은 이들의 땀과 희망이 쌓인 자리였다. 폐광 옆에 세워진 안내판은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준다. 바위에 새겨진 이름과 연도, 무너진 터널 입구 너머의 어둠까지도 이 대륙의 시간을 담고 있다. 절경은 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마주해야 할 풍경이며,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자연과 인간의 기억이 함께 호흡하는 현장이었다.
Echo Point에 도착하자, 삼자매 바위가 저 멀리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 있다. 바위는 유칼립투스 숲 위에 솟아 있는 듯, 고요한 위엄을 뽐낸다. 거대한 자연의 조형물은 수천 년 동안 풍화와 침식을 견디며 이 자리를 지켰고, 그 흔적은 마치 세월의 지문처럼 표면에 새겨져 있다. 삼자매 바위 주변으로 펼쳐진 절벽과 협곡, 그 위를 스치듯 흐르는 안개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라는 감각은 상대적이다. 얼마 전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보았던 협곡과 바위들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려서인지, 블루마운틴의 전경은 내게 조용한 감탄으로만 머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고요함은 또 다른 방식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래도 이곳의 숨결은 다르다. 카파도키아의 협곡이 다른 행성의 풍경처럼 비현실적이었다면, 블루마운틴은 대지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풍경이다. 협곡 사이를 누비는 바람은 숲의 향기를 머금고, 전망대 아래로는 거대한 유칼립투스 숲이 물결처럼 펼쳐진다. 그 위를 흘러가는 안개는 조용히 움직이며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이 대지를 스치는 바람과 안개, 그리고 나무들 사이를 걷는 나는, 마치 자연의 오래된 서사시 한 장면을 천천히 넘기고 있는 기분이다.
오후 늦게 들른 루라(Leura)는 광산 붐의 시기에 부자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마을이다. 이른 저녁, 골목을 걷자 길가에 늘어선 단풍나무들이 짙은 가을빛을 뽐낸다. 인도엔 낙엽이 수북이 쌓였고, 그 위를 조심스레 밟는 발걸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계절의 음악처럼 들린다. 카페 앞 테라스에서는 사람들이 코트를 여미고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쥔 채 웃음을 나눈다. 시간마저 느릿해지는 고요한 마을이다.
그때, 친구의 확인 문자. “파라마타역 18시 30분.” 낯선 도시에서 마주한 이 짧은 문장은, 마치 서울의 약속처럼 익숙하게 다가온다. 거리도, 시간도 멀지만, 그 한 문장 안에 오랜 우정과 위로가 스며 있다.
파라마타 역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유쾌한 말투와 장난스러운 눈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왕년의 유명한 배우였던 룩 허드슨의 모습까지 엿보인다. 함께 센트럴 역으로 이동해 차이나타운을 지나, 소규모 한인식당이 모여 있는 거리를 걷는다. 낡은 간판 아래 조명빛이 따뜻하게 번지는 식당 안, “광장포차”라는 이름이 왠지 익숙하고 반갑다.
제육볶음과 홍합탕을 앞에 두고, 오랜 시간의 틈을 메우듯 대화가 이어진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한 조각씩 떠올라 테이블 위를 채우고, 웃음은 식지 않은 국물처럼 따뜻하고 진하게 번진다. 함께 부딪친 술잔 너머로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고, 밤이 깊어갈수록 말들은 점점 더 깊이를 더해간다. 우리는 다시 학창 시절의 이름으로 돌아가, 그 시절의 장난기와 설렘을 되살린다. 그는 오랜 기러기 아빠 생활을 마친 뒤 자녀들이 호텔리어와 건축사로 자리 잡아 호주에서 가정을 이루며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전한다. 그 말에는 분명한 뿌듯함이 묻어났지만, 동시에 이국에서 노년을 맞이하는 그에게 여전히 낯선 하루하루의 무료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자녀들의 성공과는 별개로,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텅 빈 오후의 고요는 그의 눈빛에 담겨 잔잔한 쓸쓸함으로 다가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우버택시를 이용하려 하였으나, 전철을 이용하기로 한다. 호주의 전철과 기차는 교통카드 없이도 비자나 마스터카드 신용카드로 바로 태그 하여 이용할 수 있어 여행자에게 무척 편리했다. Central Station에서는 27여 개의 플랫폼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탑승 전 반드시 승강장을 확인해야 했지만, 다행히 방향을 잘 찾아 전철에 승차를 한다. 전철 안은 조용했고, 약 15분 정도 걸려 숙소 인근의 마스콧역에 내렸다. 역에서 약 15분 정도 걸어 도착한 숙소는 낯익은 조명으로 나를 반겼다.
짐을 내려놓고 샤워를 마친 뒤, 아내에게 영상통화를 건다. 오늘은 친구와 한잔한 탓에 짧은 인사를 나누지만,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따뜻하다. 나는 오늘의 여정을 전하고,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오늘 하루는 풍경보다도 사람이 더 많은 기억을 남긴 날이다. 여행은 결국 만남의 또 다른 이름임을 다시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