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함이 가르쳐준 삶
예상치 못한 진단
‘증상이 없는 중뇌동맥류’라는 진단을 받았다.
40년 가까이 병원에서 근무했지만, 내 몸의 위태로움을 한 번도 직시하지 않았다. 그 진단은 내 삶의 고요한 일상에 균열을 냈다. 마치 숨겨진 시한폭탄을 품은 듯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걸어가지만, 그 사실을 매 순간 의식하며 살아가는 이는 드물다. 나 역시 그랬다.
우리는 자신의 건강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나 또한 그랬다. 병원과 거리를 두고 살아왔던 내가 이 진단 앞에서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맹장수술로 잠깐 입원한 것을 제외하면 병원은 언제나 남의 일이었다. 40년 가까이 직원으로서 병원 안을 오갔지만, 그것은 업무 때문이었다. 내 몸과 직접 연결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 병원을 낯선 정류장으로 삼아, 환자로서 머물게 되었다.
그 시작은 딸의 권유로 받은 종합건강검진이었다. 무심코 받은 검진에서 뇌 혈류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소견을 들었고, 신경과 진료를 권유받았다. 한 달여를 기다려 진행된 MRI와 MRA 검사 결과, 우뇌 대동맥에 협착이 있어 혈류 속도가 빨라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경과 교수는 이를 더 정확히 보기 위해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며 입원을 권유했다. 평소 병원을 멀리했던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내 몸에 숨어 있던 진실을 마주할 순간이었다.
환자로서의 병원생활
병원에서 수십 년을 근무했지만, 환자로 머무는 병실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네 개의 침대가 놓인 그곳엔 거친 숨소리와 신음, 전화벨과 커튼 여는 소리가 이어졌다. 업무 중 스쳐 지나던 그 소리들은 이제 내 곁에서, 나를 둘러싼 풍경이 되었다. 처음엔 그 모든 것이 불편했지만, 어느새 그 리듬에 나도 하나의 음표가 되어 흘러갔다. 사람의 적응력은 참 놀랍다. 낯선 곳에서도 우리는 삶의 방식을 찾아간다.
옆 침대의 92세 노인은 딸의 간병을 받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딸은 아버지를 돌보면서도 재산 분배 이야기를 끊임없이 꺼냈다. 노인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물질적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마음의 애착은 몸의 병보다 더 깊은 질병임을 그들은 알까? 또 다른 침대의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60대 환자 곁에는 중국 동포 간병인이 있었다. 그는 늘 핸드폰으로 드라마를 크게 틀어놓았지만, 환자를 대하는 그의 다정한 말투와 성실한 손길에 병실 사람들은 그 소란함마저 받아들였다. 진정한 보살핌이란 이런 것이리라. 휴게실을 전전하던 또 한 명의 환자는 병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듯 불편해 보였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가는 모습이었다. 병은 육체만 앓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앓게 한다.
병원의 하루는 새벽 5시 30분, 간호사의 발걸음과 커튼 여는 소리로 시작된다. 그것은 마치 수행자의 새벽 예불과도 같은 정해진 의식이었다. 혈압과 혈당을 측정하고 채혈이 이어진다. 식전 혈당은 98, 혈압은 117에 86. 간호사는 무심하게 태블릿에 기록만 남겼지만, 나는 그 숫자들에 민감해졌다. 그 숫자들이 내 건강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주치의 회진이 이어졌고, 뇌혈류단층영상검사와 뇌동맥초음파 검사, 뇌동맥 조영촬영, 복부초음파 검사 일정이 차례로 설명되었다. 각종 검사실을 오가며 낯선 의료 장비와 기계음 속에서 하루가 흘렀다. 이곳은 과학과 생명이 서로 만나는 현대의 도량이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병원의 일과는 마치 수행자의 수행과도 같았다. 자력으로 일어나고 싶었지만, 간호사의 발소리와 커튼 여는 소리에 다시 깨어났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에지 오브 투모로우'처럼, 마치 'Time Loop' 현상 속에 갇힌 듯 같은 하루가 반복됐다. 혈압은 정상인데 식전 혈당은 136, 식후 혈당은 196. 생전 처음 보는 수치에 놀랐지만, 간호사는 대수롭지 않게 기록만 남겼다. 불안은 커져갔다.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병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마음은 자꾸만 먼 곳으로 달아나려 했다.
검사과정과 내면의 변화
뇌동맥 조영촬영은 그 어떤 검사보다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몸을 완전히 고정하고, 카테터가 대동맥을 타고 올라가는 묵직한 감각. 머릿속이 뜨거워지고, 감은 눈 속에 불꽃이 흩날렸다. 시간은 멈춘 듯했고, 서혜부를 누르는 압박감이 이어졌다. 내 몸 안을 탐험하는 낯선 여정이었다. 시술은 끝났지만, 다섯 시간 동안 다리를 움직이지 못한 채 누워 있어야 했다. 허리는 아팠고, 금식 중이라 배고픔마저 참아야 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의 몸은 얼마나 취약한가. 그러면서도 얼마나 강인한가.
복부초음파 검사는 비교적 편안했다. 체온과 같은 젤이 부드럽게 퍼지는 감각이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식후 혈당 수치는 여전히 불안함을 자극했다. 간호사는 변함없이 조용히 기록만 남겼고, 나는 스스로를 의심하며 두려움 속에 하루를 넘겼다. 마음이 흔들릴 때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과 나무들이었다.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흔들림 없이, 변함없이.
퇴원을 앞두고 마지막 혈압과 혈당을 재었다. 혈당 96, 혈압 정상. 그 숫자들이 주는 안도감은 컸다. 모니터에 비친 내 뇌의 3차원 혈관 영상. 주치의는 우뇌동맥 협착이 있지만 좌우 혈류 차이는 없다고 했다. 문제는 '모야모야' 여부였다. 결과는 3주 뒤에 나올 예정이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불확실성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퇴원 후, 검사 결과는 다행히 음성이었다. 그러나 6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남았다. 증상 없는 동맥류, 시한폭탄을 품은 채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주치의는 말했다. "즐겁게 살고, 맛있는 걸 먹고,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금주는 꼭 지키시되, 부부가 나누는 포도주 한 잔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의 말에 미소가 지어졌다. 의학적 조언 속에도 인간적인 따뜻함이 있었다.
유한함이 가르쳐 준 삶의 의미
‘인명은 재천이다’. 그 말이 새삼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인간의 생명이란 얼마나 신비로운가. 우리는 모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고 살아간다. 그것이 동맥류이든, 심장병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질병이든 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우리의 삶을 멈추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더 깊이, 더 충만하게 살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병원에서 경험은 내게 귀중한 가르침을 주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임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유한함을 인식할 때 비로소 매 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이제 나는 조금 더 느리게, 그러나 조금 더 깊게 살아가려 한다. 매 순간을 충실히, 깨어있는 마음으로.
시한폭탄을 품고 사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 동맥류는 내 몸 안에 있지만, 내 마음까지 지배하지는 못한다. 오늘도 나는 이 몸을 이끌고 세상을 걸어간다. 시한폭탄을 안고도, 평화로운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