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대로 떠나는 여행. 첫 날
떠나는 날, 현관 앞의 작별
비가 내리는 5월의 오후, 캐리어 손잡이를 조용히 쥐고 현관문을 나선다. 오랜 시간 곁을 지킨 아내는 문 앞에서 미소를 띤 채 말한다.
“선발대로 다녀와. 어머니 상태가 좀 나아지시면 나도 따라나설게.”
그 한마디에 어깨에 걸린 무거움이 조금은 풀린다. 장모님이 병상에 누운 지도 어느덧 2년이 되어간다. 늘 함께였던 여행길이지만, 이번에도 지난 터키, 홋카이도에 이어 나 혼자 선발대로 나서는 셈이다. 은퇴한 지 8년, 아내와 함께했던 수많은 여행이 스쳐 지나간다. 그 모든 추억 속에 아내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혼자다. 창밖으론 세찬 빗줄기가 도시를 적신다. 인천대교를 건너는 동안 앞이 안 보일 만큼 폭우가 퍼붓고, 차 안에는 빗소리와 오래된 노래가 묘하게 뒤섞인다.
이 비가 여행 내내 따라오지 않기를 바란다. 설렘과 불안, 익숙한 이별의 기분을 느끼며 공항으로 향한다.
공항의 여유, 그리고 쓸쓸함
오후 4시 50분, 인천공항 1 터미널 지하 A15 구역에 도착한다. 차를 발레파킹에 맡기고, 청사로 들어서니 생각보다 출국장은 한산하다. 오랜만에 혼자 공항에 온 기분은 어색하면서도 신선하다. 수속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직원이 “예비 배터리는 기내 반입 가방에 넣으셨죠?”라고 묻는다. 얼마 전 예비 배터리 자연 발화로 비행기가 전소된 사건으로 예민해진 듯하다.
일찌감치 게이트 앞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테이크아웃이요?”라는 바리스타의 질문에, “머그잔으로 주세요.” 은퇴 후의 생활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이런 한가로움이다. 뜨거운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도자기의 묵직한 온기가 손끝에서 마음까지 퍼진다.
아내가 좋아했던 이 작은 의식, 이제는 혼자 하고 있다. 휴대전화를 꺼내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다. “공항 도착. 커피 마시는 중. 어머니 상태는 어때?” 곧 답장이 온다. “내 몫까지 재미있게 잘 다녀와. 사진 많이 찍어와.” 혼자 떠나는 일이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구름 위, 익숙함과 작별하는 시간
옆 게이트의 중국행 탑승 수속이 시작되고, 잠시 주변이 분주해진다. 곧이어 아시아나항공 OZ601 편의 탑승 안내방송이 들리고, 줄 끝에 선다. 내 좌석은 창가다. 옆자리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부부가 나란히 앉는다. 비행 내내 두 손을 꼭 맞잡고 나지막이 웃으며 속삭이는 모습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참 다정하다. 부러움과 살짝 질투가 스치지만, 이번 여행은 오롯이 내 몫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마음에 자리 잡는다.
낡은 보잉 777 좌석은 예전 장거리 여행 때 탑승했던 에어버스 기종보다 더 좁고 불편하다. 다리가 저려 자주 자세를 고쳐 앉게 되지만, 이 모든 감정의 진폭과 깊이를 생각하면, 이런 불편은 충분히 견딜 만하다.
기장의 목소리가 기내에 울려 퍼진다. "승객 여러분, 현재 고도 11,000미터를 순항 중입니다. 시드니 현지 시각으로 내일 오전 8시경 도착 예정이며, 현지 날씨는 맑음, 기온은 18도입니다." 11,000미터. 구름 위를 나는 이 높이에서 바라보면 지상의 모든 걱정이 얼마나 작게 보일지.
비행기가 안정 고도에 오르자, 기내 조명이 어두워진다. 넷플릭스에서 받아둔 영화를 보지만, 시선은 자꾸 창밖에 머문다. 구름 위로 검은 하늘이 펼쳐지고, 달빛 아래 잔잔하게 흐르는 풍경이 마음을 가라앉힌다.
내게 익숙했던 것들―조금 전 아내와 나누었던 대화, 집에 남겨둔 강아지들의 재롱,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바라봤던 방의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익숙함은 늘 떠난 뒤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나는 스스로에게 '왜 떠났는가?'라고 묻는다. 정답은 없지만, 그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여행의 시작임을 안다.
비행이 한 시간쯤 지나 기내식이 나온다. 음식 맛은 선명하지 않지만, 한입 한입이 일상을 붙잡는 듯한 느낌이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잠을 청한다. 나는 그 사이에서 망설이고, 이날이 오기까지의 여러 고민들을 곱씹는다. 비행기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익숙한 나를 떠나 낯선 나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이 달빛에 은빛으로 물들어 있다. 마치 솜 같기도 하고, 파도 같기도 하다.
시드니의 새벽, 새로운 자리
기내 조명이 다시 켜지고, 승무원이 간단한 음료와 간식을 나눠준다. 비행기 안에는 조용한 기대와 설렘이 퍼져간다. 창밖에는 밤의 어둠이 점차 옅어지고, 아침을 알리는 푸른빛이 번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하루가 열리기 전의 고요한 틈에서, 떠나온 어제와 도착할 오늘 사이에 서서 조용히 숨을 고른다.
"승객 여러분, 잠시 후 시드니 킹스포드 스미스 공항에 착륙합니다." 기장의 음성이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창밖을 보니 해가 떠올라 붉게 물들어 오고 있다. 착륙 안내방송이 들리고, 비행기는 조용히 활주로에 내려앉는다. 사람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도 허리를 펴고 좌석 벨트를 푼다. 피곤하지만 의미 있는 피로다. 이 여행이 오래 기억되길 짧게 빌어본다, 곧 이국의 공기를 마시게 될 것이다. 그 공기가 내 안의 무언가를 흔들어 주기를, 그리고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데려가기를. 이 여정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세계를 넓히는 시간이기를.
여행은 혼자 시작됐지만, 결국 둘의 추억으로 완성된다.
“우리의 삶은 늘 찾으면서 떠나고, 찾으면서 끝나지”
– 이해인 '여행길에서 –
2025년 5월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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