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에너지
안녕하세요. 심리전문가 고병준(에이준)입니다. "누군가 홍시감처럼 내 자존감을 먹어버렸다."라는 글을 19화까지 연재하고 이어서 청소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앞선 자존감에 관련된 글과 계속 이어지는 글이니 따로 분리해서 읽지 마시고 필요한 부분은 도움을 받으시면서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몇 개월간 글을 쓰기 위해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메모장에 수두룩하게 적어 놓기만 하고 정작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현재 가장 필요하고 가장 따끈한 청소년과의 만남을 글로 적어보고 싶었다. 우리 청소년들의 생각과 어른의 생각이 얼마나 다르고, 청소년은 어떤 시야를 가지고 있는지 글을 써보고 싶었다.
내가 주로 만나는 청소년의 대상은 14~ 19세까지 이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부터 고3 학생까지 다양하다는 뜻이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강의나 교육을 해달라는 혹은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돌려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그럴 때 어떤 프로그램을 원하는지 회의를 하면 중학생의 경우는 인성교육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고등학생으로 갈수록 꿈과 관련된 진로 설정이나 스트레스 관리 등 범위가 조금은 넓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놀라웠던 점은 중학교 아이들 스스로 자신들을 중2병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중2병이라는 단어.. 얼마 전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청소년들을 만날 때 자신들을 중2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고, 자신들은 그런 병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그것을 굉장히 불편해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을 만날 때 "어른들이 너희보고 중2병이라고 한다. 너희들 알고 있니?"라고 물어보면 "네 저희 병 걸렸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나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이 이면을 살펴보면 장난으로 밝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도 낮아지고, 무언가 돌파구가 없는 듯 체념하는 아이들의 힘없는 워딩이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은 온데간데없고 학원과 학원과 학원과 학원에 치여 잠잘 시간도 부족한 아이들 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맡은 아이들 중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학원을 안 다니는 친구들은 없었다. 하지만 큰 문제는 본인들이 중2병이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완전한 상태가 바로 청소년을 대표하는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실수도 하고 경험도 하고 삐걱대는 치열함 속에서 아이들의 마음속에 올바름이 자리 잡힐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무기력함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아이들을 보니 필자의 마음이 무거웠다.
교육을 할 때도 멍하게 있고, 누군가 말을 할 때는 딴짓을 하며, 시종일관 장난을 치기 일수였다. 그래서 내가 교육을 할 때 과연 내 말을 듣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겼었다. 그래서 다시 " 선생님이 뭐라고 했지?"라고 질문하면 그 대답을 정확히 하여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어른, 선생님으로서 아이들과의 신뢰관계를 쌓으려고 했었고, 아이들은 그 지점을 부정적 에너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즉 어른의 시각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아이들이 피부로 느끼는 부정적 에너지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선생님의 권위만 높아가고, 교육적 효과나 프로그램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아이들과의 이 모든 시간이 통째로 무의미한 시간이 돼버림을 뜻한다. 나는 그때까지도 아이들의 시각과 행동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해야 하는 목표의식만 가지고 진행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 집에 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어떻게 접근을 해야 아이들과 좀 더 신뢰관계가 될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은 집에서 부모님과 이야기는 잘하고 있을까? 어떤 문제점이 있을 때 과연 누구를 찾아갈까?라는 질문이 생겼었다.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청소년 전문가 선생님께 조언도 구하고 책도 찾아보며 나만의 해답을 찾았다.
바로 청소년이 되어 보자였다. 석사 2학기 때쯤이었을까? 뮤지컬 배우 출신인 나를 교수님께서 불러 예술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짜 보길 권유하셨다. 그래서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의 생성과 되기의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중학생 되기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프로그램의 주 내용은 아이들의 목소리였다. 중학생으로서 내 내면의 목소리? 그것을 들어주는 이는 누구인가? 어른으로써 내 15세로 돌아가 본다면 어떤 느낌 일까였다. 문득 현재의 선생님으로서 석사 때의 일을 기억해보니 나 또한 어른의 시야에서 아이들을 관찰하고 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중학교 졸업앨범을 뒤져보고 나는 어떤 아이였는지 생각해보고 이미지로 최대한 뚜렷하게 만들어보았다. 그렇게 아이들을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나는 아이들과 다짜고짜 장난치고, 게임 얘기를 하며 관심사가 같은 자전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아닌 친구처럼 받아들였고 자신들의 생활패턴에 있던 고민거리들을 무수히 많이 꺼내기 시작했다.
참고로 아이들이 내가 선생님으로서 다가갈 때 어떤 고민이 있냐고 물어볼 때는 "없어요" "졸려요"가 전부였다. 그런데 아이들과 똑같은 시야, 장난 등을 치며 소소한 이야기 속에서 고민거리들을 말할 때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지점에서 굉장히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은 산만하고, 집중하지 않고, 장난치기 일수고, 친구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에 집중하는 아이들의 한 명 한 명 모습을 보면 절대로 청소년이라는 프레임에 일반화를 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어른의 그런 관점이 굉장히 안타까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 청소년을 둔 부모이건 선생님이건 다 좋다. 한 번이라도 내 아이, 내 학생의 관점에서 시야에서 생각해본 적 있는가?
왜 아이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와 아주 열 띄게 나눈 후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한 번은 자전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는 주로 MTB 산악자전거를 즐겨 타기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하니 아이들 중 한 명이 자신은 픽시를 탄다는 자랑을 하였다. 그렇게 서로 자전거 자랑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혼자서 자전거 타고 싶지 않아요."라는 한 아이의 질문이 내 마음에 들어와 앉았다. 그래서 그 말을 시작으로 아이들 전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연 그 말뜻은 무엇일까? 여러분은 지금 저 말을 들으면 어떤 이해가 가능한가?
표면적으로 어른의 시야에서 생각하거나 직관이 좋은 사람이 넘겨짚는다면 당연히 "이 아이 자전거를 같이 타고 싶구나" "혼자 타기 싫구나" 등의 결로 생각하고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생각과 언어는 그것을 뛰어넘는다. 이 아이의 이면에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것이었다. 내가 어른의 시각으로 아이의 자전거를 칭찬해주고 "자전거 있는 사람 손들어봐 앞으로 시간 맞춰서 친구들하고 같이 타보는 건 어때?"라는 언어로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의 시각으로 생각해보니 절대로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언가 마음이 불편했다. 자전거를 혼자 타기 싫다? 과연 무얼까?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계속 생각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자전거가 실은 타기 싫은 게 아닐까? 였다. 우리가 가끔 무언가를 하기 싫을 때 다른 방식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내가 중학교 때도 그랬고 아이들의 언어에서도 종종 보이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표현에 능숙하지 않아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현상이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나 너랑 놀고 싶어라는 말이 죽어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예외도 있다. 하지만 그룹 그룹 지어 다니는 아이들의 특성상 쉽게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자전거를 혼자 타기 싫어요."의 이면에는 "나는 친구들과 게임을 하고 놀고 싶어요."였다. 그렇게 나는 그 아이의 언어를 주제로 삼아 소통과 감정표현을 하는 교육을 하였고 많은 아이들이 소감에서 좋은 얘기들을 해주었다. "맨날 친하던 애들하고만 이야기하는데 얘기 많이 안 해본 친구들과도 좀 더 이야기해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평소에 조용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을 잘하는 친구인지 몰랐어요" "안 친하던 친구랑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돼서 이번 주에 같이 알라딘 보러 가려고요"라는 언어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긍정적 에너지와 부정적 에너지를 아주 쉽게 느끼고 빠르게 판단한다. 부모가 화가 나서 잔소리하면 빠르게 마음을 닫아버리는 이유도 이 맥락이다. 아이의 일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아이들은 당연히 마음을 닫는다. 아직 전두엽이 활성화되기 전이고 전두엽의 크기가 자랄 나이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청소년 되기, 청소년으로 생각하기를 굳이 안 해도 된다. 이 되기가 가능해서 이미지 트레이닝도 하고 아이들과 이야기도 나누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아이의 요즘 관심사가 무엇인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등을 대화를 통해 꼭 한 번은 들어주어라. 그런데 부모님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면 그 끝은 항상 잔소리가 되고 교정하려고 애쓰는 형식이 된다. 부정적 대화가 될 확률이 높아지는데 일단은 들어주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아이가 말한 그 관심사에 대해 한번쯤 열심히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이와 함께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아이들은 절대로 마음의 문을 닫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청소년 시절은 어땠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