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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준 Aug 26. 2019

슬픔은 회복의 정서

part. 자기 긍정



어렸을 때는 웃을 일이 굉장히 많았다. 지금과 같이 스마트폰으로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게임하는 시절이 아니었다. 연락을 하려면 직접 그 집을 가서 친구를 불러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하굣길에 어디서 몇 시에 만나기로 했었다. 혹은 그 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 친구를 불러야 했다. 그래서 "누구 친구 병준이라고 하는데 누구 있나요?"라는 아주 정중한 친구 부름 전용 예절 멘트가 있었다. 그렇게 나가서 얼음땡을 하고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몸을 쓰며 실컷 놀다 보면 얼굴에 떼꼽자국이 잔뜩 묻어있어서 집에서 씻을 때는 구정물이 엄청나게 나오곤 했다. 몸은 힘들지만 친구들과 그렇게 뛰어노는 게 재미있었다. 때로는 공사장을 탐방하며 마치 인디아나 존스가 된 거 같았다. 또 공사장에서 쓰려고 쌓아둔 모래를 가지고 놀다 물을 부어 두꺼비집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시멘트일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학교에서 오락부장이었다. 나름 말도 잘하고 개중에 웃기는 캐릭터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여러 게임을 가지고 C.A시간에 오락부장으로서 진행을 맡아 아이들과 여러 게임을 했다. 코끼리 코를 10 바퀴 돌고 주어진 시간 내에 과일 사탕이 담긴 밀가루 접시에 코를 박고 과일 사탕을 하나 물고 다시 돌아오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몇 친구는 10바퀴를 돌고 비틀비틀거리다 좋아하는 이성에게 우연찮게 넘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그 게임은 전설이 되었다. 매주 수요일 이렇게 나는 게임을 짜야했고 우리가 흔히 하고 있는 게임은 다 해본 기억이 난다. 여기까지가 나에게는 굉장히 행복한 순간의 청사진이다.


하루는 진행을 하며 웃고 즐기며 수건 돌리기 게임을 했다. 수건 돌리기를 한창 즐겁게 하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도 잔업을 보시며 우리를 힐끔거리시고는 흐뭇해하고 즐거워하고 때로는 우리보다 더 웃기도 하셨다. 그렇게 모두가 즐거워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학교 다니는 것이 즐거웠고, 내 부모님 또한 나를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아이로 키워주셨다.



한창 웃고 있는 중 선생님의 내선전화로 띠리리리리~띠리 리리~하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곤 선생님의 해맑은 표정은 온 데 간데없고 미간은 서로 합을 모아 한껏 붙어 있었다. 무언가 우리는 심각함을 감지했지만 어린아이들인지라 금방 잊고 수건 돌리기 게임에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병준아 집에 가기 전에 선생님 잠깐 보고 갈래?"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당연히 "네 그럼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라며 해맑게 어느 때처럼 웃는 얼굴로 선생님을 대했다.


얼마 후 하교가 시작되었고 인사를 한 후 아이들은 하나둘 교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선생님의 한 번쯤 앉아보고 싶은 편안한 의자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은 머뭇머뭇 말씀이 한동안 없으시고 미간은 서로 계속 붙여있으려고 안달이었다. 삐걱삐걱 의자의 요란한 소리가 멈췄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선생님은 "아까 전화를 한통 받았는데, 병준아 너희 부모님께서 나에게 거신 거야"라며 삐걱대는 의자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어 나에게 시선을 맞췄다. "놀라지 말고 들어... 집에 아주 큰 불이 났데 그래서 교과서나 옷가지들이 다 없어서 당장 내일 학교에 교과서를 가져와야 하는데 그게 걱정되셔서 선생님한테 전화를 하셨더라고" 라며 뒤의 말을 흐리셨다. 그러더니 "교과서나 준비물 걱정하지 말고, 내일 그냥 와도 돼"라며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주셨다. 그러면서 " 불이 나서 집에 가면 많이 놀랄 건데 부모님 손 잘 잡고 너무 걱정하지 마 천천히 가게로 내려가 봐"라고 하셨다.

흙탕물에도 흔들림없이 자라는 연꽃


내가 다니던 학교는 굉장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학교 자체가 오래되었기도 하고 예전에는 치수가 잘되지 않아서 낮은 지역은 범람하기 일쑤였다고 했다. 그래서 대피소로 이용할 겸 학교가 제일 높은 곳에 지어졌다는 어른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낮은 지역 한편에서 우리 엄마는 분식집을 하셨다. 그래서 학교에서 아주아주 높은 경사를 걸어 내려오면 우리 분식집이 보였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선생님은 "가게로 천천히 내려가 봐"라는 말로 나의 동선을 체크해주시고 다른 길로 가지 않게 해 주셨는지도 모르겠다. 높게 솟아 있는 우리 학교 건너편을 바라보면 산등성이 하나 보인다. 나름 동네에서 뒷동 산치고 운동하기 적절한 위치에 있었다. 그 산 입구쯤에 절벽을 병품 삼아 우리 집이 있었다. 그렇게 학교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우리 집이 똑같은 눈높이에 보였다.


나는 항상 등교나 하교를 할 때 길게 줄을 엮어 집과 학교를 연결하고 케이블카를 설치하면 집에서 한참 경사를 내려갔다가 다시 한참 경사를 오르지 않아도 될 텐데 라는 생각을 줄곧 했었다. 그런 언덕에 있던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은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다리의 긴장이 살짝 풀려있는 상태로 나는 학교 언덕에서 내리막길을 걸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벌써 이십 년도 더 넘을 때의 감정과 신체 감각이었을 텐데 그 감각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며칠 굶은 듯 한걸음 한걸음에 파르르 떨리는 내 무릎과 힘없는 걸음걸이, 그리고 마치 핸드폰 진동이 울리듯 떨리는 내손, 이마와 손에서는 달팽이가 기어가다 한입에 먹을만한 이슬 같은 땀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게 신체증상일 뿐 전혀 어떤 감정인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엄마의 분식집으로 내려갔다.



언덕 위에서 우리 가게를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우리 가게 바로 옆집의 가구점을 운영하던 깡마른 안경 쓴 아저씨, 우리 가게 자주 놀러 오는 주변의 단골손님들, 나를 이뻐하는 동네 아주머니, 그리고 아빠와 친분이 있는 동네 모임의 사람들이었다. 무언가 북적북적하는 모습에 나는 "불이 났다는 사실을 선생님께 들었지만 진짜 뭔 일이 나긴 했구나"라고 생각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엄마가 주방 한편 의자에 힘없이 초점 흐린 눈으로 앉아 있었다.






우리 엄마는 여장부 스타일이다. 힘도 세고 호탕하며, 어느 힘든 일이 있어도 극복을 잘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슈퍼맨 같은 엄마와 아빠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나의 시선에 처음으로 엄마의 우는 모습이 들어왔다. 내가 뚜벅뚜벅 가게 안으로 들어가 "엄마 우리 이제 어떻게 해?"라고 묻자 엄마는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걱정 마 우리 지금보다 더 잘살 수 있어 우리 가족이 안전하니까"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 정도만 기억나고 그때의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불이 나는 그 시점에 아빠가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가셨단다. 그래서 뭐라도 건질까 해서 그 집으로 들어가시려고 시도하시는 것을 주변 동네분들이 말리셨다. 그 덕에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물건 하나하나가 절실했고 다 잃으면 되돌리기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없는 살림에 건져보겠다고 했던 아빠의 마음이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워낙 가난한지라 사실 집안에서 중요한 물건들은 없었다. 어린 마음에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내 장난감들과 꼬마또래 지갑에 들어있는 설날에 모아둔 돈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인생은 다시 0으로 리셋되었다. 아니.... 원래 0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적십자의 도움을 받고,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몇 가지의 이부자리와 함께 생필품이 있었다. 아빠는 엄마와 다른 종류의 슈퍼맨이다. 아빠의 손을 거치면 안 고쳐지는 물건이 없다. 뭐든 만지면 고쳐지고 특히 안 들어오는 전자제품이 아빠의 손을 거치면 줄곳 새것처럼 탈바꿈하는 현상을 자주 보았다. 그런 아빠의 손으로 뚝딱뚝딱 주방 뒤쪽에 아주 작은 방을 만드셨다. 거기서 아빠, 엄마, 누나, 나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그렇게 0이던 인생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덧 34살이 되어 과거로의 회상을 통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이렇게 회상을 통해 글을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특히 초등학교 4학년 불이난 시점 이후의 학교생활이나 일상생활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을 해보려고 해도 꿈속에서 처럼 혹은 안개에 깊이 가려진 장소처럼 희미하게만 기록된 것 같다.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엄마에게 "우리 이제 어떻게 해?"라고 했을 때 엄마의 "걱정 마 우리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어"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에게는 슬픔의 정서가 한순간 고요했던 일상을 파괴한다. 누군가는 일어서고, 누군가는 주저앉는다. 그렇게 슬픔의 정서는 괴로운 일이다.







나의 가장 큰 장점은 긍정성이다. 많은 종류의 시선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며, 특히 후회되는 일은 빨리 잊고 그 대안을 마련하거나, 극복을 빨리 하는 편이다. 이러한 정서적 특징과 장점은 아마도 저때의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의 말을 빌어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아마 저 사건이 없었다면 일어서는 방법을 깨닫기 힘든 나로 존재했을 수도 있다. 혹은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리는 사람으로 존재했을 수도 있다. 어떤 종류의 사고, 사건 그런 슬픔의 정서를 통해 나는 극복할 수 있다는 회복의 정서를 배웠을 것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애도의 기간이 끝나지 않은 사람, 시련의 아픔과 상실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껴 몸이 아픈 사람 등등.. 나는 말한다 슬픔의 정서는 곧 회복의 정서라고... 누군가 죽으면 충분한 애도를 통해 그 슬픔을 극복한다. 또 상실의 아픔도 충분히 그 슬픔을 표현하고 나면 조금은 일어설 힘이 난다. 바닷가재는 연하고 흐믈흐믈한 동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딱딱한 껍질 안에서 살고 있는 동물이다. 그런데 그 딱딱한 껍질은 절대 늘어나거나 커지지 않는다. 그러면 바닷가재가 자라면 자랄수록 그 껍질은 바닷가재를 조여 오고, 압박하며, 불편하게 만든다.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바위 밑에 숨는다. 그리고 새로운 껍데기를 만들고 그것으로 갈아탄다. 하지만 역시나 연하고 흐믈흐믈한 몸은 그 껍질의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 하지만 또 살아남아야 하기에 포식자들을 피해 바위 밑에 숨는다. 이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이렇게 바닷가재가 바위 밑에 숨어 자신의 껍데기를 버리고 새로 갈아타며, 딱딱해도 그것에 맞춰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불편함이다. 아마도 바닷가재에게 의사가 있었다면 어디가 불편해요, 뭐가 힘들어요 등등 불편함을 없애는 방법을 택하면 성장 없이 현실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슬픔이라고 하는 불편함이 당장은 힘들겠지만 자신의 마음을 성장시키고 더 나아가 회복시켜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불이 난 이후에 어느 정도의 슬픔은 견뎌지고, 회복이 빨리 짐을 느낀다. 그만큼 나 자신이 굳게 성장한 것이라고 믿는다. 누군가에게 나의 슬픔을 온전히 표현하고 실컷 울어본 적 있나요?? 조금은 후련하지 않나요?? 슬픔은 회복의 정서라고 해요. 그러니 슬프면 마음껏 아파하고 마음껏 울어도 돼요. 그 슬픔을 느낀다고 그게 다 내 탓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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