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소리에 대한 기억
지난 7월 메가박스에서 재개봉한 기쿠지로의 여름을 보았다.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로 결정한 날이었다. 덕분에 알람도 맞추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났다. 기쿠지로의 여름이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미 봤던 영화여서 보러 가지 않을 예정이었다. 게다가 제일 가까운 상영관이 버스를 타고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에 있고 하루에 1번만 상영한다는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특전 이벤트도 있고 문득 이 영화의 대표 OST인 “Summer”를 영화관에서 들어야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일어나자마자 충동적으로 영화표를 예매했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여름 방학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 마사오의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돈을 벌러 먼 곳에 가있다. 같이 지내는 할머니마저 일을 나가는 상황이다. 방학이 되니 친구도 가족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떠나버려서 마사오는 혼자가 된다. 지루한 방학을 보내던 마사오는 우연히 엄마가 사는 주소를 발견한다. 여름 방학 숙제 등을 넣은 짐을 꾸려 뛰쳐나간다. 가는 도중 삥을 뜯기는 마사오를 구해준 여자는 불쌍하다며 자신의 남편에게 마사오의 엄마를 만나러 같이 갔다 오라는 부탁을 한다. 그렇게 낯선 아저씨와 함께하는 마사오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상하고 황당한 이 조합은 초반부터 순탄치가 않다. 아저씨는 엄마에게 데려다 주기로 한 것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받은 돈을 가지고 경마장에 간다. 흥청망청 돈을 써버린다. 하지만 후반부터 아저씨는 마사오를 지켜주기 위해 애쓴다. 여정 중에 만났던 다른 청년들과 함께 마사오가 남은 방학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도록 다 같이 캠핑을 하기도 한다. 덕분에 내내 보는 사람이 더 아플 정도로 고개를 숙인 채 어두운 얼굴을 한 마사오도 웃음을 짓는다. 이미 본 영화였기에 가장 기다리고 있던 타이밍이다. 이들이 자신의 마음에 남아있는 것들을 홀가분하게 떨치고 유치한 장난을 치면서 모두가 정말 ‘아이답게’ 웃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영화가 막을 내렸다. 스크린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앉아있다가 나왔다. 영화를 보러 갈까 고민했던 시간이 무의미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비록 영화 상영 전 사 먹었던 공차 스무디가 평소 레시피와 다르게 제조했는지 맛이 이상했을지라도, 옆자리에 끊임없이 대화를 하던 관객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영화관에서 듣는 사운드와 화면은 내게 색다른 여름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상영관에서 내려간 지는 이미 꽤 시간이 흘렀지만 집에서라도 이 영화를 여름에 한 번쯤 보면 어떨까 싶다.
집에 돌아오는 길도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버스에서 그간 나의 여름방학은 어땠는지 떠올려보았다. 나에게 있어서 여름은 기억하기 쉽지 않은 계절이라 어렴풋한 잔상만 남아있다. 외가 가족들과 바다에 갔던 날. 할머니 집에서 2박 3일을 놀다 온 일. 해수욕장에 가서 텐트를 치고 잤던 것. 모두 어린 시절에 치중되어 있는 기억이다. 커갈수록 여름휴가라는 개념도 흐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중고등학교 이후로는 가족과의 휴가는 거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저 집에 있는 게 더 좋아졌던 탓도 있다. 그렇게 나는 혼자 영화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성인이 되어버렸다.
이제 여름 방학이 되면 나는 종종 우울해지기도 한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여기까지 온듯한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마사오처럼 침울하기도 하고 무던해 보이기도 하는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게 된다. 뜨거운 햇빛과 지독한 더위에 지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아진다. 하지만 어쩌면 이번 여름방학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 시간도 소중하게 느껴지곤 한다. 결국 이 계절이 지나간 후에 나는 다시 여름의 소리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때 무더위에 지쳐했던 내 모습까지도.
p.s. 결국 <기쿠지로의 여름> 특전은 조기 소진으로 받지 못했답니다. 저는 여름 하면 매미나 모기 소리가 먼저 떠오르는데, 여러분이 기억하는 또 다른 여름의 소리가 있다면 알려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