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나에게 준 것
세 번째 심리 상담 날
나의 커리어, 경제 문제에 관한 답답함을 주로 토로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한없이 작아지는 내 모습,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해야 하는 현실과 그에 따른 좌절감, 금전적 불안 등을 털어놓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번역가로 일하면서 수입이 변변치 않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했고, 남들도 나를 욕하겠지만, 나조차도 나를 '기생충'이라고 여길만큼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마음을 다잡아 보려고 수없이 노력했지만 올라오는 좌절감은 막을 길이 없었다. 내가 구석에 던저진 쓸모없는 짐짝 같았다.
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인지, '돈은 힘들게 버는 거야', '돈은 나를 힘들게 해'라는 관념들에 사로잡힌 탓인지, 돈은 나에게 족쇄같이 느껴졌다. 돈을 벌어야 하는데, 다른 수입원을 찾아야 하는데,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또 상처받고 고통스러워지겠지' 하며 움츠러드는 통에 다른 일로 돈 벌 용기도 나질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상담 선생님도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볼까. SNS에 흔히 도는 댓글처럼 나를 남편 등쳐먹는 호구로 보지는 않을까 싶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SNS가 사람을 망치죠!"
대충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마음이 풀려나가서인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근데 제 힘은 아니지만 입에 풀칠하려고 당장 나가서 돈 벌어야 하는 처지가 아닌 것만 해도 감사한 거 같아요."
선생님은 듣던 중 반가운 말이라는 듯이 얼른 받아쳤다.
"○○ 님 힘이에요! ○○ 님이 고른 사람이잖아요. 부부가 얼마나 냉정한 관계인데요. ○○ 님이 쌓아 올린 게 있으니까 남편이 그렇게 해주는 거예요. 그럴만한 사람이니까 돌봐주는 거예요."
내가 짐짝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늘 내 노력은 배신당할까 좌절하고 있었는데, 내 모든 노력이 헛된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예고 없이 눈물이 터졌다.
샘플에서 떨어져도 어떻게든 다시 해보려고 노트북 앞에서 밤을 지새우고, 빨개진 눈을 비비며 노동 착취 같은 부스러기 일이라도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왕 사는 거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도 하자' 싶어서 하천에 나가 쓰레기를 줍고, 답답한 가슴을 풀어낼 길이 없어서 세 시간을 걷고 또 걸었다. 백팔배는 모자르다며 오백배를 하다가 무릎이 다 까지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새벽에 요가로 마음을 비워보겠다며 천둥번갯소리에 오돌오돌 떨면서 요가원을 갔다.
수없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울고 또 울며 빌었던 시간이 헛된 게 아니었구나.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온 남편을 향해 버선발로 뛰어나가 "대들보님 고생했어요." 하고 활짝 웃어보였다. 집이 깨끗해야 마음이 안정된다는 말을 주워 듣고, 남편을 위해 나를 위해 바지런히 집을 가꾸었다. 고생하는 남편에게 힘이 되려고 머릿속에서 예쁜 말을 골라냈다. 그렇게 보낸 모든 시간들이 헛된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하는 일, 버선발로 뛰어나가 반겨주는 일, 그거 하나가 소원인데 가족들이 그걸 해 주지 않아서 펑펑 우는 분도 있다고 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진 분이었다. 세월을 다시 돌린다면 그 직업도 포기하고 그저 가족이랑 따듯함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 님은 그분이 간절히 원하는 걸 가지셨잖아요."
나는 여전히 가진 것보다 못 가진 것을 크게 보며 살았구나.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세상이 나에게 준 것들이 떠올랐다. 나는 늘 세상에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일이 안 풀릴 때 신을 원망하듯이 신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아니 내가 이 모양이어서 세상이 나를 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은 늘 나에게 주고 있었다. 상담을 마치고 버스를 탔다. 이 버스도 세상이 나를 집에 데려다 주려고 대령해 놓은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