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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우 Dec 13. 2021

#12. 인사담당자의 덕목은 음.주.가.무?

입사 후 처음으로 인사직무에 회의감이 들었다.

신입사원 시절, 한창 팀 자체 OJT를 받고 있던 때였다. 오늘은 회사가 운영하는 3개의 사업장 중 한 곳으로 교육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자차가 없던 때라 대중교통을 검색하니 본사에서 얼추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얼마 전 개통한 지하철로 훨씬 쾌적하게 갈 수 있었다. 입사한 지 몇개월 지나지도 않았는데 처음가는 사업장을 혼자가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누군지도 모를텐데 들어갈 때 뭐라고 해야하지? 인사를 어떤식으로 해야할까? 인솔자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원래 걱정이 많은 난데 사업장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엄청난 걱정이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사업장은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넉넉하게 20분은 걸어가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름길이 있다고 알려줘 갔더니 완전 산길이었다. 등산로 비슷한 길을 저벅저벅 걸으면서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지?'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도착하니 다행히 팀의 선배 한명이 마중나와 대신 보안키로 문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시키고 본인이 준비한 교육장소로 나를 데려가주셨다. 짓누르던 걱정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드디어 나도 이 사업장에 일원이 되었다는 쾌감에 속으로 신나했다. 내가 도착하니 정말 일사천리로 착착 교육이 진행되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기술팀의 과장님이 오셔서 공장을 소개시켜주시고 현장도 들어가자며 나에게 옷을 입히고 떠밀듯 현장으로 들어갔다. 꿈을 꾸는 건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순서대로 만들어지는 제품처럼 나는 착착 순서대로 준비된 정보를 받아 머리속에 꾹꾹 넣고 있었다. 


정신없이 현장을 보고 난 후, 아까 만난 인사팀의 선배와 다시 재회했다. 


"전에는 무슨 일 했어?"


많이 받은 질문이라 별로 생각않고 바로 답했다. "00에서 인사팀 계약직으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왜 퇴사하고 여기로 입사했지?"


두번째 면접인건가? 본인의 노트북으로 업무보면서 무심하게 질문하는 선배에게 최대한 성의를 담아 대답했다.


"계약이 종료되서 어쩔 수 없이 퇴사했습니다."


"그래? 그 답변이 가장 무난하니까 취준생들이 다 그렇게 대답하는거라며?"


응? 진짜 면접같네? 실제 면접에서는 별로 안궁금해 하시던데. 그런데, 나는 정말이었다. 1년 단위로 계약하는 계약직이었다. 빨리 정규직으로 자리잡고 싶어 퇴사하고 본격적으로 취업을 준비한 것이다. 


"인사팀에 있었다 그랬지? 그럼 인사담당자의 덕목은 뭔지 아니?"


인사담당자의 덕목이라...... 취업을 준비하면서 이런 질문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 내 나름대로 답변을 생각한 것이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인사담당자의 덕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제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람을 좋아한다면 사회복지사를 해야하지 않을까? 어떤 회사의 인사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회사와 사람 사이에서 최대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뤄야한다. 또한 사람 사이에서도 중립을 지키는 것. 회사의 제도와 특정 사람이 처한 상황 사이에서 최대한 융통성을 발휘해 잡음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 나는 이런 내 생각을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그래, 맞는 얘기긴 한데......"


선배는 칠판으로 가서 큰 피라미드를 그리더니 4줄을 가로로 쓱쓱 그었다. 피라미드는 5개로 쪼개졌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 '급여/근태, 복리후생'을 적었다. 


"덕목을 얘기하기 전에, 인사업무를 처음 시작하면 어떤 것부터 해야할까? 가장 단순하고 행정적인 업무는 무엇일까? 바로 급여, 근태, 복리후생 업무야. 정해진 제도를 수행하는 업무지. 물론 급여 테이블을 만들어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업무야. 더 레벨이 높아야해."


다음 윗 칸에는 '채용'을 적었다. 


"채용은 보통 신입으로 입사한 인사담당자가 맡는 roll이야. 사실 회사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업무지. 사람 뽑는 것이 가장 힘들잖아. 하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사람은 면접관이 뽑는 것이지 채용담당자가 뽑지 않아. 채용 전형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한 행정업무를 하고, 직무 별로 적절한 사람이 지원할 수 있게 채용공고를 올려야 하지. 직무 별로 필요한 자격증, 역할이 있을 것이고 채용담당자는 이 부분을 잘 알고 있어야 해. 그래서 공부할 수밖에 없어. 그러면 자연히 회사의 조직도와 각 부서가 하는 일을 습득하게 된다. 신입에게 채용업무를 시키는 이유이기도 해"


그 다음 윗 칸에는 잠깐 망설이셨지만 '인력운영'을 적었다. 


"채용을 어느 정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람'을 알게된다. 어느 부서에 어떤 업무를 이 사람이 하고, 업무의 양은 적정한지 난이도는 맞는지 느낌이 와. 인력운영은 이 느낌을 구체화시키는 업무다. 숫자로 말야. 부서의 적정 T/O를 분석하고 매년 진행하는 경영계획에 반영하지. 입/퇴사, 부서별 이동, 전입/전출, 병/휴직 등 사람에 관련된 인사이동의 모든 것에 관여해. 보통 채용과 인력운영을 같이 하기도 하지만 내가 볼땐 인력운영은 채용보다 좀 더 상위레벨의 직무야."


그리고 나머지 두 칸에는 '평가/보상'과 '조직문화'를 적었다.


"평가와 보상업무는 보통 두 업무를 같이 진행해. 평가에 따라 보상이 결정되기 때문에 두개를 따로 뗄 수는 없어. 우리는 자회사이기 때문에 모회사가 정해놓은 평가와 보상제도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자회사만의 프로세스를 도입할 수 있다. 특히, 매출액 차이가 크니까 초봉이 같을 수는 없겠지. 급여테이블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평가도 마찬가지야. 생산직이 훨씬 많은 우리같은 케이스는 본사의 인사제도를 따라갈 수는 없어. 또 회사의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승진을 진행할 수도 있지. 돈과 관련된 업무고 직원들이 가장 예민해하는 업무이기 때문에 경험이 많이 쌓여야해.

조직문화는 인사업무의 꽃이야. 가장 힘들지만 가장 보람도 느껴. 시스템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조직문화 담당자의 힘으로 해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그 사람을 믿는 것이지. 워라밸 문화를 장려하기 위해 정시퇴근 캠페인을 하고, 사기진작을 위해 이벤트를 하고, 부서 이기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간담회를 진행하고. 이런 업무는 사실 연차가 어느정도 뒷받침되지 않으면 진행하기 어려워. 또 직급에 상관없이 한 조직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업무이기 때문에 감정소모도 심해. 그만큼 어렵지만 나로 인해 조직의 분위기가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면 보람도 많이 느끼지.

이 업무들 말고도 교육과 총무 업무도 있고 사업장에 따라서 도급사 관리 업무도 있지만 크게 이렇게 다섯가지 업무가 있다. 그냥 내 생각이니까 참고만 해."


긴 설명을 듣고 있자니 그러면 인사담당자의 덕목은 뭘까? 궁금했다. 설마 '사람에 대한 관심?' 뭐 그런 건 아니겠지? 내가 계속 빤히 쳐다보니 눈치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럼 도대체 인사담당자의 덕목은 뭔지 궁금하지?"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뜻밖에 대답이 이어졌다.


"바로, '음.주.가.무' 다. 아, MC능력도 필요하나? 아무튼 그래."


실제로, 코로나19 상황이 터지기 전까지는 일주일에 한번 꼴로 술자리가 있었다. 부서별 간담회, 생산직 간담회, 팀장 간담회 등등 간담회 종류도 엄청나게 많아서 한 달에 거의 4~5번 꼴로 간담회를 진행했는데 간담회 뒤에는 꼭 회식이 있었다. 인사담당자는 그 회식에서 진행자 역할을 자처해야 했고 장소섭외와 회식이 끝났을 때 팀장님들의 대리기사 콜까지 맡아서 했다. 신입사원인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이게 현실이구나, 했었다. 취준생때 보던 정장입고 수많은 취준생들 앞에서 회사를 홍보하던 훤칠한 인사담당자는 적어도 이 순간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술 엄청 마셨을걸? 술 잘 못한다면서, 고생 좀 하겠는데?"



 

정신없던 사업장 OJT가 끝나고 왔던 산길을 터벅터벅 되돌아가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었다. 이 길이 맞는 것인지 처음으로 의심했던 순간이라고 해야하나. 직원들의 고민을 술의 힘을 빌려서만 해결하는 느낌이 들었고, '나때는 일주일에 7일을 술을 마셨었어!' 하는 호기로운 자랑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내 미래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우울했다. 아, 나는 정말 이 길이 맞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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