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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우 May 20. 2023

모르겠구요, 대표님 지시사항입니다.

몇년 전까지 회사에는 마법의 단어가 있었다. 


'내가 000님한테 얘기할게.'

'000님 지시사항이야.'


000님은 그 당시 대표님의 성함이었다. (우리회사는 직급을 부르지 않고 이름에 님을 붙여 부르는 문화가 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실무자인 나와 먼저 협의를 해야되는 일들까지 먼저 대표님에게 구두로 보고하고 나에게 통보하는 식이었다. 대표님은 왠만한 사안이 아니면 실무자에게 전권을 맡기는 분이라 가능했던 것도 있다. 또한 다 이렇게 '일을 편하게'했던 것은 아니고 특정 몇몇의 과장급 이상의 분들이 주로 했던 방식이었다.


그런데 최근 대표님이 바뀌고 주요 의사결정권자가 교체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신입사원 시절이라 '아, 이런게 회사의 의사결정이구나.', '대표님도 다 생각이 있어서 승낙하신 거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정확한 숫자와 논리를 설명하지 않으면 좀처럼 의사결정이 나지 않는 체제로 바뀌었다. 내 생각도 그래서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이렇게 밑천이 드러나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요즘은 점점 깨닫는다.


최근 매출액이 급감하면서 회사는 여러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강도높은 원가절감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채용도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정말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개월 사이에 생산직의 퇴직이 많아 성수기가 오기 전에는 채용을 해야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해당 팀에게 채용의 소요를 물었다. 필요하다는 답변과 함께 그에 대한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는 메일이 왔다. 현재(비수기) 대비 성수기에 몇명이 필요하고 왜 필요한지를 적은 표였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라고 하는 것은 '퇴직했으니까 당연히 채워야 된다.'는 단순한 논리였다. 팀장님에게 이런 내용을 보내드렸더니 한번 검증해보라며 몇가지 방법을 알려주셨다.


'전년 비 생산량과 비교해서 줄어드는 지 늘어나는 지 볼 것'

'필요하면 구성차까지 고려해 필요한 인원을 산정해볼 것'

'구성원의 연차, 병가 등 이상근태 비율 또는 구성원의 피로도를 종합해서 원활한 현장 운영을 위해 실제 필요한 인원을 산출하고 회사 경영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고정비 절감으로 얼마의 인원을 효율화할 수 있는지 고려할 것'


사실, 의사결정권자 입장에서는 세번째가 가장 큰 고려요소가 아닐까 싶다. 실제 필요한 인원보다 적은 인원을 채용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면 채용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거기다가 인사팀장님은 생산직은 제조업의 특성상 최대한 뽑자 주의여서 더 그랬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채용이 필요한 부서의 팀장은 인사팀장의 생각이 생산직을 뽑아야된다는 주의이니 만큼 그 분의 '마음'에 들어서 읍소하는 전략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뽑아야 되는 팀장과 인사팀장과의 대화를 들어보면 알 수 있었다. 맥을 전혀 못잡고 어떻게든 힘드니까 봐달라는 느낌으로 접근하는 그 부서 팀장님을 보니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짠했다. 예전같으면 000님 지시사항이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해결됐을텐데.


여기서 두 분의 대화를 다 적으면 누군지 특정할 수 있을 것 같기도하고 자세히 기억도 나지 않아 오해만 불러일으킬까봐 더는 적지 않지만 그때 받았던 내 느낌만큼은 생생하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 것은, 결국 일을 배울 때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산인지 그리고 그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오신 인사팀장님이 어떤 결정이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피곤한 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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