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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중 Oct 05. 2019

 거울 속 나는 누구요?

사전 준비 1: 치매 뒤에 숨은 두려움 이해하기


난 치매 환자를 진료하는 정신과 의사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정신과 의사의 역할은 사람의 깊은 심리와 그 무의식적 역동을 이해하고 우울이나 불안, 신경증적 상태를 치료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치매 환자를 진료한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다시 물어본다.


‘치매는 생각이 사라지는 병인데 왜 정신과 선생님이 보세요?’


사실 내가 치매를 전문으로 선택한 이유도 치매라는 병이 너무 명확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정신과 전문의 수련을 받으면서 다른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처럼 사람들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게 어려웠다. 그런 관점에서 다른 정신과적 문제와 달리 치매는 뇌영상 검사나 표준화된 인지기능 검사도구로 바로 진단이 나왔다. 내가 정상, 경도인지장애, 치매 중 어떤 진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들의 10년~15년 삶의 예후와 경과가 정해졌다. 적어도 그 당시 내 눈에는 말이다. 그다음 나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치매라는 병은 되돌리기 어려우니 늦추는 것이 목표라는 말과 함께 치매 약을 처방하면 됐다. 마지막으로 그들에 대한 동정심이 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어색한 미소와 함께 괜찮아질 것이라는 피상적인 말로 위로한 후 상담을 끝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치매라는 ‘병’보다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이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은 노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도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느꼈을 때 찾아와 나중에 치매에 걸리지 않을지 미리 걱정했다. 정신과 약을 오래 먹은 사람은 혹시 약이 치매를 유발하지 않는지 매번 물어왔다. 한 환자는 불안감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여러 치매보험 상품을 들고 와 뭐가 자신에게 맞는지 골라 달라 요청하기도 해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실제 치매가 의심되어 가족들과 같이 온 노인들은 그 두려움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도 모른 채 보호자 손에 이끌려 와 경직된 표정을 짓거나 자신에게 뭔가 결함이 발견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과장된 말과 제스처를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치매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해 냈는지 내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길게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결국 두려움을 드러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면 항상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그 시점에서부터 치매 환자에 대한 내 '두려움'도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실습 경험을 위해 들린 한 요양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요양원 입구를 지나 나는 다른 실습생들과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첫 병실로 들어갔다. 깨끗하고 넓은 침대에 누워있었던 대학병원 환자들과 달리 요양원에 누워있는 노인들은 바닥에 깔린 요에 누워있었다. 그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 허공을 응시하며 약간 벌린 입에 마치 보이지 않는 껍질에 싸여 있듯 몸을 움직이지 않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각자의 세계가 따로 있는 듯했다. 그 세계는 마치 평행우주처럼 연결되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를 안내해주던 간호사는 그들을 말기 치매 환자라 설명했다. '말기 치매 환자가 되면 기억력과 같은 인지기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능력, 언어능력, 사고능력을 포함한 인간이라 특징 지울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집니다.'  간호사는 매일 봐오던 그들의 모습에 익숙한 듯 치매 증상에 대해 설명해주며 환자들 사이를 지나갔다. 낯선 사람의 방문을 경계하는 할머니 한분이 우리를 응시하자 간호사는 그분 옆에 앉아 우리가 어떤 이유 때문에 왔는지 설명했다. 우리는 의도치 않게 이방인으로 경계 대상이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분들과 물리적 거리를 둬서 불편하지 않게 해 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두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순간 물컹 내 발에 무언가 밟혔다.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기 전에 순간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내가 밟은 건 말기 치매 상태로 허공을 보고 있던 할머니의 마른 장작 같은 손가락이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밟은 할머니 손에 골절이 생겼을까 봐 두려운 게 아니었다. 내 뒤에 전혀 사람으로서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 내 뒤에 있다는 느낌'이 그렇게 큰 의미로 나에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내가 밟은 건 사람의 손가락이 아닌 반응 없는 물건으로 내 발에 전달되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그 순간 내가 사는 세상과 그분이 사는 세상은 절연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그분에게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갖는 두려움이 있다.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는 존재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필연적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사후 세계, 신, 영혼이라는 초월적 존재나 내가 이 세상에 남길 의미를 필사적으로 찾고 그 영속성을 만들어내려 한다. 죽음의 두려움처럼 모든 사람에게 오는 것은 아니지만 치매가 갖고 오는 두려움 또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들이 갖게 되는 두려움의 핵심은 '존재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존재하고 있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내 진료실에서 그들은 내가 아직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있는 존재임을 필사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는 그들과 그들이 사랑했던 세계를 연결하기 위해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오해가 다시 우리 세계 안에서 연결되었으면 한다.


“우리 옆에 우리의 감정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있을 때에만 우주는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

(11분-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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