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ey to the moon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내 진료실 책상 한 켠에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 '인연'을 놔두고 자주 본다. 그 책의 첫 번째 장에 나온 에세이 '수필'의 첫 구절이다. 수필은 이런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다. 은유(metaphor)의 효과는 이런 것이다. 은유는 뻔할 수 있는, 그렇기에 무미건조할 소재를 생동감 있게 만들고 그것의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하도록 하는 힘이 있다. 은유의 과정은 사유의 확장을 가져온다.
은유는 글뿐만 아니라 질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도움이 된다. 병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잘 사용한 은유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병에 걸리기 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을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치매 환자의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는 건 내 가족이 이전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을 때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사람이 항상 분노에 차 있고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거나 심하면 가족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가족들이 그 괴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슬프고 어려운 일이다. 이때 우리는 은유의 힘을 빌릴 수 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1994년 11월 알츠하이머 병을 진단받았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치매를 숨겼던 다른 유명인들과 달리, 부부는 알츠하이머 병에 대한 관심과 인식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병을 모든 사람들에게 밝힌다.
'친애하는 미국 국민 여러분!'
'나는 최근에 본인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수백만 미국인들 중 한 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낸시와 나는 이 사실을 우리만의 사적인 비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여러 사람들에게 알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알림으로써 이 병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이 유발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지만 병이 점점 진행되고 레이건 대통령 또한 치매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친숙한 사람들의 이름을 잊고 기억도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었다. TV에 나온 백악관을 보며 그곳에서 살았다는 사실 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아내가 외출이라도 하면 아내를 찾아 온 집안을 헤매는 레이건을 보며 보며 아내 낸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부분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시간이 지나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수준까지 악화되었다고 하니 그 사이에 부부가 경험했을 상황은 어느 정도 일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싶은 건 미국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병조차 공개하고 맞서 싸워 온 그의 초연한 모습일 것이다. 치매에 휘둘러 점점 나약해지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낸시 데이비스 레이건 여사는 남편의 치매를 '여정'이라는 은유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Ronnie의 긴 여정은 마침내 그를 더 이상 닿을 수없는 먼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치매로 대소변도 못 가리고 자신의 아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노인이 아닌, 고통스러운 '여정'을 꿋꿋이 견뎌간 남편의 삶을 '여정'이라는 한 단어에 집약했다.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먼 곳'이라는 표현을 통해 치매로 인해 멀어진 자신이 알고 있던 남편과의 심리적 거리를 드러냄과 동시에 남편의 인지, 행동, 감정 상태에 대한 세부적인 모습을 그 안에 숨길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낸시는 남편의 존엄을 지키고 미국 국민들이 바랬던 남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했다.
외국에서는 퇴행성 뇌질환의 의학적 관점에서도 치매를 연구하지만, 치매를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그중에서 치매의 비유법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교육하고 있는 비베케 드레브젠 바흐의 은유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비베케 드레브젠 바흐는 정상인과 치매 환자의 뇌 핵의학 검사 (brain PET) 검사에 착안하여 치매를 설명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녀는 붉고 노란색으로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정상인의 뇌에서 지구를 연상하고, 푸른색으로 활동력이 떨어진 치매 환자의 뇌에서 달을 떠올렸다. 그리고 치매가 진행되는 것을 환자가 지구에서 달로 향하는 여정(journey to the moon)이라 불렀다. 그녀는 이를 '아주 익숙한 삶'에서부터 '매우 낯선 삶'으로의 여행이고 극적으로 다른 삶이라 설명한다.
당신의 아버지가 지구에서 멀어질수록 뇌 안에 있는 내비게이션이 점차 작동하지 않을 거예요. 단어와 문장들, 행동이 바뀌기 시작할 겁니다. 그가 말하는 단어와 문장들이 변형될 거지만 당신의 아버지는 창의력을 발휘할 겁니다. 그는 새로운 단어들을 찾기 시작할 거예요. 새로운 단어로 말하려고 할 거예요. 그는 자신만의 암호를 쓰기 시작할 겁니다. 그 암호를 '달에서 쓰는 말'이라고 할게요. 당신이 달의 언어를 듣게 된다면 아무 뜻이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해요. 달의 언어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해요. 계속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으려면 그 언어에 적응하는 법을 훈련받아야 하죠. (비베케 드레브젠 바흐의 TED 강의 중 참조)
비베케 드레브젠 바흐박사는 앞의 낸시 레이건 여사가 사용한 여정 (journey)라는 은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지구에서 달로 향하는 여정'으로 풀어냈다. 게다가 치매로 이상한 말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달에서 쓰는 말'이라는 은유와 '아버지가 창의력을 발휘한 것'이라는 해석으로 대체함으로써 아버지의 존엄을 지켜줌과 동시에 가족이 느끼는 좌절감의 무게를 덜어줬다. 더 나아가 가족들은 아버지가 쓰는 알 수 없는 말을 암호로 받아들여 이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과 함께 망가진 모습이 아닌 그 안에 숨어 있는 감정과 마음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은유의 방식으로 치매를 이해하는 게 모든 상황에서 전적으로 옳다는 건 아니다. 치료적 개입을 위해서는 단순하고 확실한 의사소통이 효율적일 때가 있다. 나쁜 치매 증상으로 피해망상이 심각하고 환각을 경험하고 있는 상태에서 달나라로 갔다느니 달에서 쓰는 말을 쓰고 있다고 하면 치매의 은유를 잘못 활용하는 것이다. '당신의 아버지가 치매로 인해 뇌의 언어 기능이 손상됐고 이로 인해 상황에 맞지 않거나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직설적으로 서로 소통해야 한다. 은유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건 병의 전체적인 과정을 받아들일 때다. 또한 수잔 손택이 그녀의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언급했듯, 질병을 은유의 방법으로 해석할 때 병을 병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사회적 편견과 프레임을 씌울 수도 있다는 점도 항상 유의해야 한다. 마치 에이즈라는 병을 면역결핍으로 인한 병 자체로 보는 게 아니라, 동성애자들에 대한 하늘의 천벌로 낙인찍었던 것처럼 말이다.
가장 좋은 건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는 일이 모두 그렇지 않은가. 고통을 내 힘으로 다룰 수 있다면 이미 그건 고통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고통을 어떻게 마음에 담고 살지 고민한다. 은유는 그 과정에서 지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주기도 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현재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정신과 수련을 받고 있을 때 은사가 회진 중 뜬금없이 시를 열심히 읽으라고 했던 것이 떠오른다. 또 한 선배는 환자의 마음을 비유의 방식으로 다시 설명할 수 있다면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은유의 힘을 나에게 가르치고 싶으셨나 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은유는 수년간 전문기술을 익힌 사람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가고 누구나 은유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치매의 은유법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 시도가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작은 위안을 줄 수 있는 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참조:
https://vpt.dk/plejecenter/mennesker-med-en-demenssygdom-er-pa-en-rejse-fra-jorden-til-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