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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중 Dec 16. 2020

나쁜 치매 증상으로서의 '무감동증'

우울증 약을 먹어도 효과 없는 가짜 우울증

요새 고집이 너무 세졌어요. 뭐라 해도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 화가 나요

가족들도 처음에는 나이 들어 그런 것이려니 생각하다가 점점 문제가 심각해진다. 어느 날부터 하루 종일 말도 없고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려는 동기나 의욕도 없다. 한 자리에 가만히 있으며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고 주변에 관심도 없다. 친구나 친척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에도 두 눈만 꿈뻑일 뿐 적절한 감정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니 가족들은 노인을 다그칠 뿐이고 억장이 무너진다. 처음에는 노인 우울증으로 알고 병원을 방문하나 치매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증상은 나쁜 치매 증상 중 하나인 무감동증(apathy)이다. 사실 무감동증(apathy)이라는 단어부터 애매하고 어렵다. 이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pathos'(passion, 열정)가 'a'(없는), 즉 열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무뎌진 감정 정도를 뜻했지만 요새는 동기(motivation)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2009년 유럽, 미국, 호주의 정신의학자들이 모여 만든 정의에 따르면 무감동증은 동기의 저하와 더불어 목표 지향적 행동, 인지, 감정의 세 영역 가운데 최소한 두 영역 이상에서 시작(initiation)과 반응(responsiveness)의 결핍이 있는 상태다.  


나쁜 치매 증상으로서의 무감동증은 치매 전 단계나 초기 단계부터 잘 나타난다. 알츠하이머 치매와 전두측두엽 치매, 혈관성 치매에서 잘 나타나며, 알츠하이머 치매에서는 우울증보다 높은 빈도로 나타난다고 알려질 만큼 흔한 증상이다. 무감동증이 있는 노인은 언뜻 보면 게을러 보인다. 또는 가족들이 보기에 노인이 고집을 부리거나 어떤 이유로 화를 내고 있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뇌의 동기와 의욕을 담당하는 부위, 즉 '동기회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동기회로 (붉은 고리): 전두엽-피질하 회로 by Hoffmann M

동기 회로는 앞쪽 뇌와 안쪽 뇌의 연결고리인 전두엽-피질하 회로(frontal-subcortical circuits: anterior cingulate cortex-ventral striatum-globus pallidus-substantia nigra-thalamus-anterior cingulate cortex)로 이뤄져 있다. 이 부위가 손상되면 동기와 의욕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활동이 줄어든다고 알려져 있다. 치매가 진행되면 전두엽이 손상되기도 하지만 대뇌 피질 아래(피질하) 뇌 부위도 손상되어 연결고리가 쉽게 끊어질 수 있다.


행동의 영역에서 무감동증이 생기면 어떤 동작이나 일을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마치 220 볼트로 작동하는 TV에 그 보다 약한 전력만 흘러 켜지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한 자리에 앉아 수 시간을 표정 변화 없이 앉아있다. 어떤 경우에는 식사 조차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들의 시간만 멈춘 듯이 말이다.


인지 영역의 무감동증은 어떤 행동의 목적을 인지하거나 다른 행동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한 가지 생각에만 휩싸여 있다. 심심해서 TV를 켰는데 하루 종일 멍하니 화면만 응시하고 있다. 무슨 내용을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렇다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 산책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두 눈은 TV의 시끄러운 화면에 고정되어 있지만 어느 순간 무슨 이유로 저 네모난 박스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감정 영역에서의 무감동증은 감정이 무더져 그 상황에 적절한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아내가 죽었지만 이를 알리는 자식에게 고개만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가 누워 TV를 켠다.


문제는 노인의 이런 모습을 우울증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의욕도 없고 활동도 하지 않으니 일단 우울증으로 의심해보는 건 당연하다. 비록 주위에 관심이 떨어지고 욕구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우울증과 무감동증은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분명히 다른 증상이다.


(1) 무감동은 우울증과 달리 슬프거나 괴로운 감정이 없다. 그렇기에 우울증은 우울한 사람의 표정과 , 행동이 만드는 분위기로 인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전염성이 있는 반면 무감동증은 그렇지 않다.
(2) 무감동증에서는 우울증의 신체 관련 증상,  불면증, 식욕 변화와 같은 어려움이 나타나지 않는다.
(3) 우울증은 반복되는 극단적이고 비관적인 사고가 특징이라 주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나 무감동증은 고통의 호소가 없다. 그렇기에 무감동증은 가족이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흥미와 관심이 떨어지고 감정 반응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무감동증에 항우울제 약물을 사용하게 되면 우리가 기대할 만큼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 특히 항우울제 중 일차 선택 약물로 많이 쓰이는 Serotonin Selective Reuptake Inhibitor(SSRI, 우리가 흔히 아는 프로작, 팍실 등의 약물이 SSRI 계열 약물임)은 무감동증에 효과가 제한적이고 오히려 효과를 보기 위해 약물 용량을 더 올리게 되면 간혹 더 악화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무감동증과 우울증상을 감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최근에는 나쁜 치매 증상으로 나타나는 무감동증에는 항우울제에 대신 항치매 약물(도네페질, 리바스티그민, 갈란타민, 메만틴)이 더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간혹 메틸페니데이트(소아에서 ADHD 치료 약물로 사용) 같은 중추 신경 자극제가 도움이 된다고 하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치매약이 무감동증에 효과가 있다는 것은 노인이 무기력해 보일 때 우울증과 더불어 치매 검사도 적극적으로 받아봐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약물 이외 무감동증을 겪고 있는 노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uVOTxjiBk_0

발췌:  Western Australian Clinical Training Network  (https://www.youtube.com/watch?v=uVOTxjiBk_0)


간략히 동영상 내용을 설명하자면 무감동증으로 인해 식사를 거부하는 상황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이유를 물어도 대답도 없고 눈도 안 마주친다. 돌봄 제공자 입장에서는 답답한 수준을 넘어 화가 날 상황이다. 이에 전문가는 천천히 치매 노인에게 대화를 걸기 시작한다.


우선 치매 노인의 흥미와 욕구, 관심은 항상 변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무감동증이 악화된 신체적, 심리적, 환경적 원인을 찾는 것도 하는 것도 중요하나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돌봄 제공자의 불안해하고 당황한 모습은 치매 노인들에게 자신들이 뭔가 잘못했다는 뉘앙스로 전달될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 환자를 다그치지 않는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무감동증은 뇌손상으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이다. 다리가 마비되어 걷는 것 밖에 못하는 사람을 뒤에서 밀어 뛰게 하다간 넘어진다. 만약 몇 번의 격려에도 환자가 좌절해서 따르지 않는다면 그 활동을 중지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준비다. 그냥 내버려 두라는 메시지가 아니다.


셋째. 노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빨리 파악하고 이에 맞는 다른 활동을 제시해본다.  만약 돌봄 제공자가 치매 노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알고 있다면 도움이 된다. 이는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인지, 어떤 성격의 사람이었는지를 기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감동증에서 삐걱거리고 있는 치매 노인의 '동기 회로'를 돌리는 게 꼭 밥을 먹는 행동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일단 움직이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풋 인 더 도어 테크닉 (foot-in-the door technique)', 즉 문간에 발 들여놓기라는 심리학적 기술이 있다. 작은 부탁을 들어준 뒤에 더 큰 부탁을 쉽게 들어주는 경향을 말한다. 문간에 발이라도 들여놔야 대화라도 시작할 수 있다. 작은 긍정적 행동이 모여 '동기 회로'를 돌릴 연료가 된다. 대신 그 연료들은 치매 노인이 관심을 가질 재료여야 한다. 즉 그들의 삶의 방식(lifestyle)을 이해함으로써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사례에서 전문가는 치매 노인이 재즈음악을 즐겼던 사람이라는 것과 치매 발병 전에는 금요일에 재즈음악을 들으며 댄스파티를 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른 돌봄 제공자에게 카세트를 가져올 것을 요청한다. 왜 식사를 하지 않는지 다그치는 대신 환자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관심을 돌리는 대안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에 치매 노인은 전문가와 살짝 눈을 마주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등 소극적이나마 대화에 반응을 보인다. 물론 이 사례의 마지막을 보면 우리의 기대와 달리 노인은 여전히 식사를 하지 않는다. 돌봄 제공자가 매정하게 식판도 가져가 버린다. 하지만 누구도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우리 모두 '동기 회로'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참조)

Apathy: 개념의 변화와 전망, 송후림*박원명 J Korean Neuropsychiatr Assoc 2011;50:354-361

Hoffmann M. The human frontal lobes and frontal network systems: an evolutionary, clinical, and treatment perspective. ISRN Neurol. 2013;2013:89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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