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고스톱 치는 것을 좋아했다.
빨간 뒷면, 하얀 바탕에 알록달록한 색채로 그려진 앙증맞은 그림이 그렇게 귀엽다고 했다.
어느 회사에서 만든 고스톱이 가장 손에 착착 감기는 맛이 있다고 하며 반 타짜 같은 모습을 보였다.
경로당에 다녀와 고스톱으로 돈을 따 올 때면 그렇게 의기양양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한 손에 아이스크림이 담긴 검은 봉지를 흔들며 외손주들을 찾았다. 가끔 혼자 계실 때면 심심풀이로 화투점을 치셨다. 그중에서도 돈벼락을 맞았으면 좋겠다며 똥광 패를 가장 좋아하셨다. 화투점에 똥광 패가 나오면 '이게 들어와야 하는데 이게'하며 패를 들어 경쾌하게 바닥에 내리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비가 올 듯 몸이 찌뿌둥하다며 방에 혼자 들어가신 어머니는 어느 때처럼 이불 위에 화투를 만지고 있었다.
'엄마 뭐해?'
딸이 옆자리에 앉았는데 그날따라 이상하다. 어머니는 화투를 요 위에 펼쳐 놓기만 하고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왜 어디가 아파?'
'.......'
'엄마!'
한동안 대답이 없던 엄마는 순간 정신을 차린 듯 딸을 보며 읊조렸다.
'그러게 날씨 때문에 그런가. 좀 누워야겠다.'
피곤해 보이는 엄마의 모습에 딸은 쉬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금방 또 털고 일어나겠지. 찰나의 순간이지만 어머니의 눈빛에서 처음 느꼈던 낯섦. 한참 후 방에서 나온 엄마의 모습은 딸이 알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에 묻혀 엄마의 낯선 눈빛은 딸의 마음에서 곧 사라졌다.
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날'이다.
그때는 몰랐다. 어머니 마음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말이다. 그리고 이미 치매가 진행되어 자신이 숨겨놓은 돈이 없어졌다며 딸에게 소리치고 화를 낼 때 즈음 다시 이전으로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을 딸도 알고 있었다. 자식들은 자신이 알던 부모의 모습이 아닌 낯섦에 순간 멈칫했던 기억을 자주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이 놓쳤던 그 순간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을 내비친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고 나이 들어 귀가 안 좋아 그러려니 생각했다. 갑자기 간을 맞추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이제부터 반찬은 사드시라 오히려 핀잔을 줬다.'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분명 그 당시 낯섦에 대해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리라. 그러나 열에 아홉은 별 문제가 아니려니 믿으며 마음에 묻고 잊어버린다.
'이렇게 치매가 갑자기 진행될지는 생각도 못했어요'
물건이 망가지는 것은 바로 알 수 있다. 조용히 잘 작동하던 컴퓨터가 버벅거리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우리는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오래 쓰지 못하겠구나 하고 대충 어림짐작 한다. 차도 타다가 평상시 느끼지 못한 작은 떨림이라도 생기면 바로 알아채고 정비소를 찾는다. 특히 내가 아끼던 물건이라면 작은 흠짓도 바로 눈치 챈다. 그러나 이상하게 사람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다. 특히 오랜 시간을 같이 하거나 감정적으로 깊게 엮여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오히려 오랜만에 만난 친구나 이웃이 그런 변화를 더 잘 느낄지 모른다. 그래서 이를 사람 사이 무관심으로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자식은 부모의 낯설음을 외면했던 것을 후회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내가 본 그들은 둔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부모를 잘 알고 이해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부모 옆을 지켜왔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모와 같이 울고 웃고 싸우기도 하며 서로의 감정적 깊이를 쌓아온 자식들이다. 그럼 그들이 치매에 대해 무지했던 것일까? 인터넷이나 방송, 요새는 보험 광고에서 조차 도배된 치매라는 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정부에서도 치매 국가 책임제라는 기치를 내걸고 치매 예방에 대해 힘쓰고 있다. 게다가 요새는 주위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남일 같지 않다며 가족끼리 서로 관심을 갖고 정보를 공유한다. 즉 이는 단순히 치매에 대해 많이 알고 적게 알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럼 남들처럼 부모의 치매 예방을 미리미리 준비시키지 않아서였을까? 전문가들은 치매를 예방하기 위한 운동, 식이 등등을 귀가 닳도록 교육한다. 치매 예방을 위한 다음과 같은 노력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교육의 다른 관점을 들여다봐야 한다. 치매라는 병이 발생한 이유가 오로지 운동을 안 해서, 식사 조절을 못해서 만은 아니다. 그냥 병이 발생한 것이다. 병의 발생에 나는 '우연'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한 두가지를 놓쳐서 병이 생긴다는 식의 해석은 막연한 죄책감과 후회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자식과 부모'이기에. 그렇기에 망가지는 것은 뒤늦게 알게 된다.
'자식'은 높은 산처럼 든든하게 자신을 감싸 안고 있는 부모가 어느 순간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언제나처럼 내 편이 돼주고,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주며, 힘들어 지칠 때 잠시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길 원한다. 어린 시절 목욕탕에서 보던 아버지의 등이 그렇게 넓어 보일 수 없었다. 비누칠을 해도 수십 번을 문지르며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욕 의자에 앉아있는 아버지의 휘어지고 야윈 등을 봤다. 한없이 내가 기댈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넓은 등과 어깨가 이제는 아니었다. 그때의 슬픔은 아마 나만 느꼈던 감정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자식은 그 낯섦을 마음에서 밀어내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다. 인정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 욕구가 변해가는 내 부모의 모습으로부터 자식의 눈을 잠시 가렸을지 모른다.
'부모'는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짐이 되기 싫다. 조금이라도 내 자식이 더 웃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게 하고 싶다.
그렇기에 부모는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식들을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작은 어려움 정도는 마음에 묻고 가고 싶다. 자식들이 웃고 있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다. 그러다 병원에 오는 순간 그런 부모 때문에 자식들은 불효자가 되어 있다. '이렇게까지 진행됐는데 왜 알지 못했느냐. 더 나빠지기 전에 왔었어야지. 매년 건강 검진 한번 안했냐? 이런 검사 한번 안 받아봤냐?' 자식들은 두 눈만 꿈뻑일 뿐 대답하기가 어렵다. 어느 순간 정말 자신이 무관심했다는 것을 너무도 쉽게 인정하고 후회와 죄책감으로 자신을 채찍질 하기 시작한다.
'엄마'
딸은 전혀 몰랐다. 딸이 엄마의 혈압약을 대신 받기 위해 동네 의원을 찾았을 때였다. 오랜 기간 엄마를 봐왔던 의사 선생님이 엄마의 안부를 물으셨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머니한테 혈압약은 빠뜨리지 말고 꾸준히 먹어야 한다고 알려주세요.'
진료 기록지를 살펴보던 의사 선생님이 딸을 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검사는 한 번 받아보셨어요?'
'네? 무슨 검사요?'
'마지막에 오셨을 때 어머니가 고스톱이 치매에 도움이 되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걱정이 많아 보이시길래 기억력 검사 한번 받아보시라고 권했는데'
엄마는 무서웠구나. 왜 본인도 두렵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구나. 딸의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미안하다.
망가지는 것은 뒤늦게 알게 된다.
당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이 그 순간을 놓친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
단지 당신은 자식이고 당신이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었을 뿐이다.
무의식은 부모의 야윈 모습을 단지 당신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심연에서 느낄 당신의 두려움의 깊이를 알고 있기에 잠시 눈을 가린 것일지 모른다. 단지 그뿐이다.
그리고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줬으면 한다. 당신의 부모도 두렵고 무서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 한가운데서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단지 그뿐이다.
그게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이 말이 더 애잔하게 다가오는 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