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후 1년’이라는 시간의 의미
정신과에는 응급입원이라는 시스템이 있다. 자살 위험이 아주 높다고 판단되거나 시도를 한 경우 경찰, 정신보건 요원의 판단하에 나라에서 지정한 병원에 3일간 입원을 요청할 수 있다.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도 모르게 술을 마시고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른 경우도 있고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상황은 오랜 기간 죽음을 준비해온 사람들을 만났을 때다.
'죽음만이 그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상황. 이 길 말고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비극이 얼마나 강렬한지 목도하게 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똑같이 비극적인 자살에서도 노인과 젊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차이를 느낄 때가 있다. 노인에서, 특히 치매 환자나 암환자처럼 병으로 인한 고통이 원인인 경우, 그 고통을 마감하기 위한 죽음의 선택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경우가 있다. 루이체 치매의 고통으로 발병한 지 10개월 즈음 삶을 내려놓았던 로빈 윌리엄스를 보며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는가? 그런 마음의 발로가 최근 노인의 안락사라는 구체적인 이슈를 불러일으키는 건지도 모른다.
삶의 공포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가 지니는 저항력은 강력한 것이어서 마치 문의 출구를 지키고 서 있는 문지기와 같다... 그러나 생명의 마지막에는 어떤 극적인 것이 있는 법인데, 그것은 육체의 파멸이다. 바로 이것이 사람을 두렵게 하고 공포에 떨게 만든다. 육체는 살려는 의지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인생론, 자살에 대해서)
그런데 만약 당신의 부모가 당신 앞에서 '어차피 나의 종착역이 죽음일진대,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이를 더 빨리 맞이한다고 큰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면,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도와달라고 하거나 최소한 눈감아달라고 부탁한다면?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부탁이 될지 모르겠다.
자신의 우울증 경험을 기록한 '한낮의 우울'의 저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앤드류 솔로몬은 실제 난소암에 걸린 어머니로부터 자살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앤드류 솔로몬과 그의 아버지, 법학도였던 남동생 모두 어머니의 그런 결정에 경악을 하고 설득하려 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되는 것에 공포가 컸던 어머니의 결심을 바꿀 수 없었다.
그 이후의 8개월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기간이긴 했지만 어머니에겐 병을 얻은 후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고 우리에게도(그때 우리가 겪었던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것 때문에) 평생 가장 행복했던 시기 중 하나였다. 일단 미래가 결정되자 우리는 완전한 현재를 살 수 있었으며 그것은 전에는 아무도 체험해 보지 못했던 삶이었다. (저서: 한낮의 우울 중 발췌)
그녀의 어머니는 8개월 후 암이 진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에게 '때가 된 것 같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삶을 마감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어머니의 것이었다'는 앤드류 솔로몬의 말처럼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지켰을지 모른다. 그런데 어머니의 뜻에 따른 삶의 마지막 선택에 대한 작가의 기록 이면에 숨어 있는 죽음의 모습은 그의 기억에서 '평생, 가장,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에 뭔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어머니의 욕실을 치운 열흘 뒤에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남은 약은 어떻게 된 거니?' 아버지의 노기등등한 물음에 나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된 약은 모조리 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우울해 보여서 그 약을 아버지의 손이 미치는 곳에 둘 수 없노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넌 그 약들을 버릴 권리가 없어.' 긴 침묵이 흐른 뒤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중에 나도 병들면 그때 쓰려고 남겨 뒀던 건데. 그러면 약을 구하려고 수고할 필요가 없잖아.' (저서: 한낮의 우울 중 발췌)
죽음의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 어머니의 자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의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비록 어머니는 정신적 한계에 도달했고, 주위 사람들 또한 난소암으로 인한 끔찍한 고통을 인정했기에 그녀의 자살은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남은 가족들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과 자살이라는 잔혹한 현실에 노출되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열리지 말았어야 할 죽음과 자살을 경험하고 나면 주위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갖는다. 어느 순간 너무나도 쉽게 죽음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고, 죽음의 유혹에 쉽게 시달리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사회적 접근이나 개인의 심리 문제, 의학적 측면의 설명 한 가지 만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를 콕 짚어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 이런 현상은 유명인의 자살 후 자살하는 사람이 더 늘어나는 베르테르 효과처럼 강력하고 전염성이 있다.
자살을 철저히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와 자살은 개인의 의식 수준에서 다룰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자살은 세대를 거쳐 또는 가족에게 번지며 그들을 죽음의 유혹에 쉽게 빠지도록 한다. 단순히 충동적 자살 성향이 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는 마치 카를 융이 이야기한 인간의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원형으로 이뤄진 두 사람 사이의 집단 무의식이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자살과 죽음으로 인한 혼란에 뒤섞여 공명하는 것 같다.
자살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역설적으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이 고통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자살을 용인하거나 정당화하기 어려운 이유기도 하다. 특히 노인의 자살은 심리적인 문제만으로 뒤엉켜있지 않다. 경제적인 이유, 건강의 악화로 인한 신체적인 이유(치매나 암과 같은 질환)등 고통스러운 사연을 듣다 보면 그런 선택이 어쩌면 합리적 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은 자살이다. 자살로 인한 죽음의 무게는 눈을 감는다고 분명 가벼워지지 않는다. 자신보다 사랑했던 사람들을 끝나지 않는 고통에 빠뜨리는 것이 과연 인간다운 선택일지에 대해 누구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삶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을 뛰어넘을 때 노인들은 그것을 언제까지 견뎌 낼 수 있을까. 국내 건강보험자료 분석에 따르면 10년간 36,541명의 치매를 진단받은 노인을 조사한 결과 113명이 자살로 사망하였고 이들이 치매 진단 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대략 1.2년 정도의 시간 차가 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치매 환자뿐만 아니라 암에 걸린 노인들도, 뇌경색에 걸린 노인들도 진단 후 1년 내 자살 위험이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물론 이를 모든 노인 자살로 일반화하기 어렵겠지만, 자신의 힘으로 극복해 내지 못할 벽을 만나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기까지 걸리는 '1년'이라는 시간은 질병이 자살에 미치는 영향만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왜 1년이라는 시기에 그들은 자살을 치열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인가.
'진단 후 1년'은 노인 자살 예방을 위해 중요한 시기라는 메시지를 넘어, 그들의 눈 앞에 죽음이 더욱 또렷한 현실로 나타나 마주하게 되는 순간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 고귀한 죽음(인간다운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마지막 순간이 될지 모른다. 일단 죽음이 더 진행되면 (치매가 진행되거나 암이 악화되면) 온전한 정신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마주할 기회조차 잃어버릴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시기에 더 치열하게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실존적 고민하게 된다. 이 결론이 자살로 이어지던,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정해진 결론일지언정 저항하며 삶을 선택하던, 이 시기의 죽음의 공포는 그들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진단 후 1년'의 시간은 우리에게 고귀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막연한 희망을 갖고 맹렬하게 달려드는 게 아닌, 자기기만적인 환상에 삶을 마무리하는 것만이 목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내 삶의 무게를 혼자 오롯이 직면하게 되는 시간으로서의 1년이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두려움, 고통, 기대 등을 혼자만의 생각으로 머무는 것보다 가족, 친구와 같이 소중한 사람들과 고귀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현실에서 그들이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일지 모른다.
대신 그들이 진지한 고민 대신 거대한 고통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우리 마음에도 준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살을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어느 순간 그들의 마음에 동화될 만큼 강한 정서와 논리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1. 우리가 다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통제력을 잃었다는 믿음) 중에서도 아직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직 삶에서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이 글을 시작한 이유도 그런 작지만 이뤄낼 수 있는 변화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일지 모른다. 치매가 주는 비극적인 삶에 대한 낙인, 한 가정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고통, 그리고 자신이 잊혀 가는 두려움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흐름 안에서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 나쁜 치매를 착한 치매로 바꾸기 위한 노력들, 왜곡된 형태일지언정 인간다움이 증상 안에 어떻게 잠재되어 있는지를 알아과는 과정, 그리고 그 고통조차 견뎌내며 어떨 때는 한계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을 완수하려는 누군가가 있다.
2.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점점 진행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죽으면 다 편해질 것이라는 전제는 옳지 않다.
합리적인 자살을 이야기할지라도 자살은 자살이다. 자살은 비참한 현실과 고통을 씨앗으로 자라났기에 그런 선택은 본질적으로 편안함을 가져오지 못한다. 건물에서 뛰어내린 자살시도자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며 바라본 눈빛에서 나는 절대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앞에서 앤드류 솔로몬의 가족이 겪었던 경험 것처럼 자살은 심연의 바다처럼 아직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한 사람의 자살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모든 사람에게 번져 나가는 모습을 간과할 수 없다. 자살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남기고 간다.
3. 우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힘.
자살에는 많은 이유가 있고, 일반적으로 보면 가장 당연해 보이는 이유가 반드시 가장 확실한 이유는 아니다.
자살에는 수많은 동기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볼 때 가장 표면적인 이유들이 가장 유력한 이유들은 아니었다. 깊이 반성한 끝에 자살하는 일은 드물다. 거의 언제나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위기의 발단이 된다. 신문에서는 흔히 실연이니 불치의 병인 운운한다. 이와 같은 설명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라나 바로 그날, 절망에 빠진 사람의 친구 하나가 그에게 무관심한 어조로 대꾸한 적은 없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그자가 죄인이다.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그때까지 유예 상태에 있던 모든 원한과 모든 권태가 한꺼번에 밀어닥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발췌: 알베르트 카뮈의 시지프 신화)
반대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거대한 힘이 우리를 압도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우연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자살시도를 하려는 순간 갑자기 울려온 전화 벨소리.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의 배고픔. 뜬금없이 전화 온 누군가의 관심. 지나가던 사람이 우연히 해준 말, 우연히 발견한 작은 글귀 하나다.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그런 것들 말이다.
진단 후 1년의 과정은 노인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 옆을 지켜줄 가족들에게도 중요하다. 가족들 또한 두렵다. 그래서 당사자와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부모님한테 치매에 대해 이야기 해야나요? 암인걸 알려야 하나요?' 서로 남은 삶에서 지키고 싶은 것들을 공유했을 때, 가족들에게도 돌봄이 막막하고 두려운 부담이 아닌, 마지막까지 그들 옆을 지켜주기 위한 이유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살은 무조건 나쁘다, 고귀한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여기선 그들의 짐을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는 없다. 단순한 위로나 격려는 더 상황을 악화시킬지 모른다. 그 대신 그들이 죽음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자신을 잃기 전에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지 않고 생각할 수 있도록 옆에서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게 바로 고귀한 죽음에 대해 정의 내리기 전에 우리가 고민해야 할 숙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론을 내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진단 후 1년'이라는 시간은 그들에게 죽음을 선택하도록 강요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한 편으로 내 삶에서 소중한 것, 지키고 싶은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이 고통을 견뎌내면서도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출처)
한낮의 우울. 앤드류 솔로몬. 민음사
시지프 신화. 알베르트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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