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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중 Apr 06. 2021

길 위의 할머니

치매 노인의 배회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한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미역과 할머니라는 두 단어만 마음속에 맴돌았는데, 검색하다가 부산 경찰이 올린 페이스북 글을 다시 찾았다. 내 기억에 사진 속의 보자기 두 개가 애잔하게 각인되었던 것 같다.

출처: https://star.mbn.co.kr/view.php?no=1215290&year=2014


딸 이름도 자신의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전형적인 치매 할머니다. 그녀에게 손주의 출산은 얼마나 기뻤을까. 그리고 출산 후 지친 딸에게 미역국 한 그릇 먹이고 싶은 어미의 마음에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경찰분의 도움으로 딸을 만나고, 다 식은 국이라도 그 마음을 전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치매로 아직 그 모정이 사라지지 않아 다행이다.


어떤 가족은 길 잃은 할아버지를 탕약기가 줄지어 서 있는 탕약원 앞에서 찾았다. 흑염소 진액 냄새가 워낙 강렬하게 할아버지를 끌었을 수도 있지만, 자식들은 과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새끼들 허하지 않게 보약이라도 한 첩 해주고 싶어 했던 아버지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현재 눈 앞에 보이는 길이 아닌 과거의 감정이 스며든 마음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길'은 단순히 어딘가 도달하기 위해 지나치는 물리적 공간의 의미만 담고 있지 않다. 감정이 스며든 길은 그 본래의 목적과 다른 새로운 의미를 담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 길 위에서 오매불망 자신을 기다리는 자식을 떠올리는 아비의 마음을 담기도 하고, 외로움에 정처 없이 걷다 어느새 위로받은 추억을 남기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 추억이 아스러지고 희미해져도 감정이 스며든 길은 선명하게 남아 어느 날 문득 그 길 위에 서 있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앞에 줄지어 있던 다섯 개의 문방구를 지나자마자 나오는 첫 번째 골목길은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그 골목길이 나한테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건 겨울이 되면 눈이 쌓여 미끄럽지 말라고 연탄이 뿌려져 있았던 것과 언젠가 집 앞에 쌓아둔 연탄을 발로 한번 세게 차고 도망갔던 기억이다. 또 다른 기억은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 두 친구들과 이 골목길을 비상 탈출로라 부르며 진지하게 작전을 짜던 기억인데 아마 술래잡기 중이었던 것 같다.


어느새 내 마음에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그 길과 관련된 어떤 장면이 아니라 그 길 자체가 됐다. 맨 오른쪽 마지막 문방구를 끼고돌아 바로 나오는 첫 번째 골목길 말이다. 그 길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져 집에 갈 수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길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오랜 기간 퇴적된 감정이 남아 있다. 만약 나도 기억을 잃어버리고 어딘가 돌아다니게 된다면 왠지 그 골목길 앞에 서 있을 것만 같다. 조각난 잔상과 그 안에 스며있는 감정에 이끌려 나 또한 두 다리를 움직이고 있을지 모르겠다.   


미역국 한 그릇의 온기가 딸을 찾아가던 할머니의 그 길 위에 아직도 남아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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