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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늘 Sep 25. 2024

거문고 요정 박우재가 들려주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

[Review] 수림뉴웨이브 국악 독주회 : 혼자서 천천히 나나

누군가가 자신의 키 만한 검정물체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스태프인가? 애초부터 무대에 덜렁 방석 하나만 있었기에 공연 세팅은 언제 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마이크 없이 검정물체를 든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오늘의 주인공, 박우재 연주자였다. 검은 케이스에서 거문고를 꺼내며 능숙하게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그는, 마치 자신의 방 안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시작하기 위해 이렇게 등장했다고 한다. 


<수림뉴웨이브> 세 번째 주인공, 박우재 - 오프닝 中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그는 <수림뉴웨이브> 2차 하반기의 세 번째 공연자이자, 필자에게는 피리 연주가 곽재혁에 이은 시리즈의 두 번째 공연 관람이었다.  


올해 수림뉴웨이브는 독주회 컨셉으로 진행된다. 국악 독주회를 보러 가면 악기가 궁금해져야 하는데, 되려 사람이 궁금해지는 건 내 성향 탓일까? 왠지 모르게 종종거리는 자세와 해맑은 미소는 거문고보다도 '박우재'라는 사람을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번에는 오프닝에서부터 연주자가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마치 라디오를 듣는 것 같았다. (실제로 라디오 진행해도 잘할 것 같다. 목소리가 중후하고 나긋나긋했다.) 거문고가 세팅 되기 전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해, 그는 '왓츠인마이백'을 시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준 방석, 파우치 등을 꺼내 이에 대한 역사를 훑었다. 


공연 기획에 있어서 정말 자유도가 높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주 목요일마다 김희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수림뉴웨이브' 공연에서는 연주자마다 '말 거는 사람'이 한 명씩 붙는다. 저번에는 '말 거는 사람'이 MC의 역할을 대신했다면, 이번에는 박우재 연주자가 MC를 하고 '말 거는 사람'이 된 관계자는 관객석에 앉아 질문을 했다. 그래서 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우리처럼 연주자와 얼굴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 그래서 더더욱 '박우재의 보이는 라디오' 같았다.



서론이 길었다. 이번 공연의 주인공은 박우재 그리고 거문고이다. 거문고는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악기이지만, 가야금보다는 덜 알려져 있다. 사실 나도 거문고가 ‘술대’라는 막대기를 이용해 줄을 튕기는지는 처음 알았다. 가야금은 손으로 뜯고, 아쟁은 활로 소리 내는 건 알았는데 말이다. 서양악기로 따지면 ‘비올라’ 정도 되는 인지도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박우재 연주자 소개란에 실험적으로 거문고를 다룬다고 했을 때, 정통 거문고 연주도 본 적은 없어 '이게 새로운 건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 같이 공연을 보러 간 엄마가 전에 전통 국악 합주를 본 적이 있었는데, 본래 거문고는 다소 남성적인 느낌이 있다고 한다. 그런 감성을 기대한 엄마에게는 조금 아쉬웠던 것 같다. 확실히 술대로 줄을 뜯고, 타악기처럼 내리치는 동작들을 봤을 때 좀 거칠다고는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박우재는 실험정신이 강한 사람이다. 오프닝에서도 악기 세팅부터 시작하는 기획을 봤을 때는, 그는 어떤 틀을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연 제목도 <혼자서 천천히 나나>이다. 혼자서 천천히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는, 다소 엉뚱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 공연 연주곡은 모두 본인 작곡이었다. 


1. 나나
2. 번짐 (원곡 : 육박십분 / 작곡 : 박우재, 박지하)
3. 점


총 세 곡을 연주했는데, 두 번째 '번짐'은 거문고를 아예 거꾸로 놓고, 그러니까 좌우를 바꾸어 비올라 활로 현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이 이 곡은 스파이 영화 이미지가 떠올랐다. 사극 버전의 스파이 영화를 찍으면 OST로 제격일 것 같은. 내가 아는 전통국악의 애절함이 돋보이기보다는 그 떨림이 비장함을 강조했다. 한번 들어보자. 


https://youtu.be/Rq9qoTq3tfg?si=AXEogoHf6SwK0IFY


수다를 떨 때는 마냥 해맑던 그가,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180도 표정이 달라지는 걸 보고는 천상 예술가이긴 한가보다 생각했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이번 공연에는 곡 중간에 관객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있었다. 그의 스타성 때문인지, 그의 팬임을 자처하는 관객이 많았다. 확실히 관객석에도 사람이 많았다. 관객 중에는 음악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던 것 같은데, 그분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질문은 내가 기억하기에 다음과 같았다.


어디서 영감을 받으시나요? 슬럼프는 없으셨나요?
예술을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역시나 예술에는 어떤 비결이 있는 것일까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관객들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거문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본 박우재와 거문고는 그랬다. 거문고는 그에게 사물이 아닌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였다.


마치 사람의 양팔이 밤새도록 당겨지면 얼마나 아플까 생각한 그는 줄을 짱짱하게 하는 어떤 장치를 한 채 거문고를 밤새 두지 않는다고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풀었다 조였다 한다고 한다. 거문고는 그에게 하나의 생명체였다. 그의 연주에도 그게 느껴졌다. 


'거문고'라는 악기를 연주하기보다 '거문고를 만지는 나' 스스로를 연주하는 느낌이랄까?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도 마치 춤을 추는 듯했고, 거문고를 향한 몰입감은 단숨에 주변의 공기를 삼켰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단점과 장점도 모두 사랑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거문고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안 채, 그를 다루고 있는 듯했다. 


평생의 짝을 만난 그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평생토록 탐구할 대상이 생기기도 한 것이니까. 


그런 대상을 일찍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다. 평생의 짝을 찾아 헤매고, 싫지만 좋고 좋지만 또 싫은 그런 대상을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나 나는 박우재에게 고난은 없었냐는 질문을 하는 많은 관객들이 스스로 질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건, 외면하는 무언가를 따라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연 中 관객과 대화하는 박우재 연주자


<혼자서 천천히 나나> 공연 제목처럼 박우재는 자신만의 템포가 있는 사람이다. 혼자서 자신만의 박자를 나나~하며 사는 그는 자기를 게으르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완벽주의자이기도 하다.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안다. 허투루 음을 내지 않는다. 약간 수학자 같기도 하다. 어떠한 변수도 공식화하여 음 하나하나를 정확하고 섬세하게 낸다. 


뉴웨이브 시리즈 중 거문고 연주자가 한 명 더 있어, 다음 공연도 신청했다. 한 번쯤은 필히 비교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연주자가 내는 거문고 소리는 어떠할까? 같은 거문고 소리라 비슷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다른 소리를 낼까? 아래는 하반기 <수림뉴웨이브> 공연 일정이다. 무료이니 네이버로 필히 예약해 보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꼭 어떤 팬 분의 말처럼, 새로운 앨범도 내주기를 기대한다. 전통 연주가 아닌 그만의 방식으로 창작한 곡들이 또 어떤 감각을 새로 건드릴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분명 유튜브 영상으로는 한계가 있다. 실제 무대에서 또 다른 세계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수림아트에디터 수퍼(SOOP-er) 2기

*본 리뷰는 수림문화재단으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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