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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늘 Oct 10. 2024

레이어가 풍부한 파인다이닝 같은 매력의 사진 전시

[Review] 김희수 아트센터, 기슬기 작가의 <전시장의 유령> 리뷰

거울 앞에서 우리는 카메라를 들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어느 정도 적당히 우리의 모습이 가려지면서, 내 모습을 표현하기 적당한 장소가 거울 앞이다. 그래서 힙한 장소에는 전신거울이 배치되어 있는 듯하다. 거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을 보낸다. 힙한 플레이스는 거울을 이용해 홍보도 하고, 손님들이 머무는 시간도 늘린다.


‘거울’은 그만큼 흡입력 있는 매체이다. 거울, 카메라, 렌즈, 스크린 등 무언가를 담으면서도 무언가를 또 투과시키는(반영시키는) 물건들은 언제나 흥미롭다. 어쩌면 거울은 OTT의 전신인지도 모른다. 재밌으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엘리베이터에는 그러한 이유로 이미 거울이 걸려 있다. 


그러면 전시장에 거울이 걸려 있으면 어떨까? 


여기, ‘거울’을 주 재료로 하는 사진 전시가 있다. 기슬기 작가의 <전시장의 유령>이다. 김희수 아트센터의 갤러리, 단체전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에 기슬기 작가의 개인전이 열렸다.


이미 여러 번 개인전도 연 실력 있는 작가로, 사진작가이지만 ‘사진’을 넘어서 설치까지의 작품을 하는 작가이다. 공간을 들어서면 알 수 있듯이, 작품이 바닥에 있거나 통돌이처럼 원을 그리며 걸려 있다. 사실 워낙 공간이 커서, 작품이 놓여있지 않는 빈 공간에서 오는 공허함이 사뭇 분위기를 경건하게 만들지만 그만큼 작품에 집중이 잘 된다.


<프라이멀 셀피 Primal Selfie>,  2024, 거울 위에 UV프린트, 60x60cm (15점)


첫 번째 작품은 <프라이멀 셀피>이다. 프라이멀(Primal)이라 하면, ‘원시의, 태고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태초의 셀피, 셀카라는 뜻의 작품이다. 작품 제목답게 바닥에 놓여있는 동그란 거울에는 작가 얼굴의 상이 담겨 있다. 마치 고개를 숙여 호수나 연못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행위를 연상케 한다. 실제로 한 고대 신화를 떠올린다.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된 나르키소스 신화. 호수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다가 물에 빠져 수선화가 된 나르키소스. 거울, 유리 이전에 시간순삭매체로 ‘물(water)'이 있었던 것이다. 물이야말로 무엇을 담으면서도 또 투과 혹은 반영시키는 매체이다. 태초의 사람들도 물 표면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얼굴을 점검하고, 심지어 사랑에 빠지게도 만들지만 자신의 얼굴을 점검하면서 자기혐오의 감정을 들게 하기도 한다. 어떤 생각과 감정이든, 매우 시간을 잡아먹는 물건임에는 틀림없다. 


작품을 내려다보면 하지만 정작 관객 자신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얼굴이 대신 그려져 있기도 하고, 표면이 약간 불투명하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은, 다음 작품으로 걸음이 빨리 옮겨진다. 다음 작품은 <전시장의 유령>. 전시제목과 같은 작품으로 공간 한가운데 자리한 작품이다. 


<전시장의 유령>, 2024, 금색 아크릴 거울 위에 UV 인쇄, 88.5 X 178.5 cm (12점)


금빛이 도는 역시나 거울과 같은 표면에 나체 여성의 모습이 프린트되어 있고, 가운데 정중앙을 12점의 금빛 거울이 둘러싸고 있다. 매우 기괴하다. 팸플릿 설명에도 적혀 있듯이, 조이트로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조이트로프는 영화 이전, 회전을 통해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환영을 만드는 시각 장치이다.  


가운데 바닥에 그려져 있는 점에 서서 실제로 작품을 둘러보면 환영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거울에 비친 나는 ‘나’이기도 하고, 저 나체 여성을 촬영한 ‘작가’이기도 하고, 또 한편 내 모습과 겹쳐 있는 ‘나체 여성’이기도 하다. 실제로 가운데 서 있는 ‘나’라는 존재는 이도 저도 아닌 유령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또다시 이상한 기분을 가지고, 마지막 작품을 감상하러 공간 맨 끝으로 들어가면, 이번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작가 자신이 프린트되어 있는 여러 개의 직사각형의 거울이 포진되어 있다. 아까 금빛 거울은 좀 구부러져 있었다면, <너의 건너편>에 사용된 거울은 다소 평평하여 내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그래서 다시금 핸드폰을 들어 셀피를 찍고 싶은 욕구가 들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웃기게도 나만 나오는 게 아닌,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진작가의 모습도 같이 담겼다. 내가 그를 찍고 있는 건지, 그가 나를 찍고 있는 건지도 모르게. 더 웃긴 건, 오프닝에서는 작가가 실제로 나타나 그런 우리의 모습을 또 찍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너의 건너편>, 2024, 아크릴 거울 위에 UV 인쇄, 239 X 119 cm (7점)


이렇게 카메라는 대상을 향하여 총구를 겨눌 수밖에 없는 매체이다. 그러나 기슬기 작가는 카메라 앞에 거울을 댄다. 렌즈라는 총구를 자기 자신에게 또는 관객 스스로에게 향하게 한다.


얄팍하게 생각하면,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여 ‘반성’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 ‘거울’을 보고 우리는 반성을 하지는 않는다. 되려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반대로 자기혐오에 빠지기 때문에 거울을 별로 보지 않기도 한다. 그렇다면 거울, 카메라 렌즈, 혹은 더 나아가 스크린(화면)에 자기 모습이 나오는 것을 어떤 의미로 바라볼 수 있을까? 


분명 거울을 통해 우리는 반성을 하지는 않지만, 왜곡된 상을 본다. 진짜가 아닌 내 뇌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위와 같은 매체를 통해 본다. 결국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을 때까지 나의 진짜 객관화된 모습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거울이라는 혹은 예술이라는 매체를 토해 우리는 그 오차를 줄여가는 걸까?


어떻게 보면 기슬기 작가는 사진으로써 표현되는 결과물보다는, 사진으로 나오기까지의 메커니즘에 관심이 더 많은 작가라고 생각했다. 가장 객관적인 매체, 기록의 가장 최전선에 선 ‘사진’이라는 매체는 기슬기 작가에게 기록의 도구가 아니다. 작가가 보는 시선, 감각의 표현 수단이자, 실험의 도구이다. 어쩌면 근대적인 예술과는 전혀 다른 의미인 현대적 관점의 사진을 가장 잘 이야기하고 작가인 것 같기도 하다. 


가령 이제 영화나 예능에서도 많은 불문율이 깨졌다. 영화 <데드풀>에서처럼 배우가 카메라를 쳐다보면서 관객에게 이야기를 한다던지(더 이상 새로운 게 아니다), 예능에서는 나영석 PD를 기점으로 카메라에 나와서는 안 되는 스태프들이 나와 재미를 준다던지, 이미 일반인이라고 일컫는 인플루언서의 TV활동도 활발하다.


현대로 올수록, 각 개인 간의 거리가 좁혀졌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정의도 다 무너졌다. 지난 9월 27일에 열린 토크쇼에서 기슬기 작가는 ‘사진’이라는 게 좀 답답해 설치적인 부분도 가미하는 작품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지금은 덩어리를 가지고 싶어, 다시 사진다운 사진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덧붙였지만.... 작가 역시도 현대에서 예술을 하는 이유가, 자신의 시선 취향이 굳이 공유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했던 듯하다. 이미 많은 이유와 의미가 무너졌으니 말이다.


9월 27에 열린 <전시연계토크> - 패널 : 기슬기(작가), 정현주, 김미정, 김수정 (왼쪽부터)


사진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 시선, 감각. 이것들은 사실 다 허상이고 왜곡이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는 것처럼 똑같이 카메라에 담을 수 없고, 심지어 거울에 비치는 모습도 실제 나의 모습이 아니다. 좌우가 반전된 허상이지. 스크린 속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을 주재료로 하지만, 무작위성이 기본값인 현실과 다르게 스크린 속 세상은 너무나도 논리적이다. 기승전결이 완벽한. 


그래서 예술이라고 하면, ‘몰입’의 관점에 있어서 한 끗 차이인 것 같다. 한 끗 차이로 몰입이 확 되게 하거나, 혹은 깨지게 해서 익숙함에 균열을 주거나. 단순히 모방에서 점차 자신의 생각을 담아가는 예술의 발전 과정만 봐도 예술과 사실, 오락과 파인아트는 한 끗 차이이다. 


최근에 유행했던 예능 <흑백요리사>에서는 파인다이닝 음식이 많이 나온다. 파인다이닝 음식은 얼핏 보면, 한입거리밖에 안 되고, 어떤 맛일지 예측이 안 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좋게 평가받은 파인다이닝 음식을 보면 레이어가 풍부한, 따로 놀지 않는 집약된 음식이었다. 


기슬기 작가의 작품도 파인다이닝 같은 매력이 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다. 워낙 사진이라는 매체가 눈으로 보기에도 두께가 얇아, 자칫 의미도 얇아 보일 수 있는데, 파인다이닝 음식처럼 한번 맛보면 그 안에서 다양한 레이어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기슬기 작가의 전작도 그렇고, <전시장의 유령> 작품도 보기에 예쁠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다양한 레이어들이 작품 안에 숨어 있다. 


이를 풀어내려면, 연작 에세이로 써야 할 만큼 말이 길어지기에 오늘은 맛보기만 쓰지만. 어쨌든 전시를 다 보고 나니, 전시 동선부터 작품의 표현 재료, 의미 등의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게 진짜 조심해야 할 게, 휙 보고 가시면 안 된다. 진짜 끓이면 끓일수록 국물이 진해지는 것처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뭐가 많이 나오기에, 찬찬히 시간을 두고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다행히도 <전시장의 유령>의 관람료는 무료이기 때문에, 여러 번 가보길 추천한다. 10월 19일까지 김희수 아트센터 갤러리에서 진행된다. 한편, 아트센터에 하나 바라는 점은 물품보관함을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나 같은 보부상 뚜벅이는 전시를 보러 갈 때, 짐을 좀 내려놓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보러 가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파인 다이닝과 같은 예쁘고 레이어도 풍부한 전시를 보러 올 수 있지 않을까. 



<Primal seflie 2-13>, 2024, 거울 위에 UV프린트, 60 X 60 cm


*수림아트에디터 수퍼(SOOP-er) 2기

*본 리뷰는 수림문화재단으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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