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꼼지 Oct 04. 2022

카레와 부부에 대한 밸런스게임

  2년만에 친구들이 모였다. 신혼인 C만 제외하고 모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었으므로 오랜만의 모임에 몹시 들떠있었다. 하지만 사방팔방에 흩어져 사는 네 명이 서울 북쪽에 있는 C의 집에 모두 모이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느라 지쳐서인지,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이야기가 겉돌았다.


  밥을 다 먹고 커피를 마실 때쯤에야 예전처럼 속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 둘을 키우느라 오랫동안 휴직하다가 최근에 복직한 A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가 일하면서 애 키우는 거 힘들다니까 남편이 그냥 관두래. 자기가 벌어다주는 돈으로 애들 보면서 여유롭게 지내라고."

  A의 남편은 변호사였다. 몇 년 전, 본인 사무실을 차렸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었는데 일이 잘 되는 모양이었다. 연말정산을 하고 나서 추징당한 세금만 1800만원이라고 했다. 얼마나 돈을 많이 벌면 이미 낸 세금에 또 1800만원을 더 내라고 하는 걸까. 연말정산에서 70만원을 돌려받고 몹시 기뻐했던 나로서는 좀 부러운 이야기였다.


  "그래도 좋겠다. 남편이 돈 잘 벌어서 와이프한테 관두라고도 해주고. 어쩔 수 없어서 맞벌이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잘 벌어와서 좋긴 하지. 근데 그 돈 벌어오는 동안 나는 완전 독박육아야. 남편은 일하고 들어오면 방전되서 자기가 먹은 물컵 하나도 안 씻어놓는다? 설거지통에 담아놓기나 하면 다행이야."

  아이가 둘인데 물컵도 안 씻어놓는 남편을 생각하자 마냥 부러워할 수만은 없었다. 설거지와 빨래, 화장실 청소 등을 모두 맡아 해주는 남편과 살아도 육아와 살림은 가끔 사람을 도망치고 싶게 만든다. 돈을 많이 벌어다주지만 육아와 살림에 도움을 줄 수 없는 남편과 육아와 살림을 함께 하지만 맞벌이가 필수인 남편 중에 누가 더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A의 한숨이 깊었다. 그래서 나도 남편에 대한 고민을 풀어놓았다.

  "우리 남편은 할 건 다 해. 그런데 내가 뭐 해달라고 하면 기분 나쁜 얼굴로 맨날 '네가 해.' 이런다? 어차피 해 줄 거 왜 그렇게 기분나쁘게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자 다섯살 어린 남자와 결혼한 B가 말했다.

  "우리 남편 진짜 순하잖아. 알지?"

  알지, 알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할 때, 언제나 웃는 얼굴로 B의 말을 다 들어주던 B의 남편은 여전히 순하게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말하면 언제나 오케이야. 다 한대. 근데 진짜 열받는 건 웃는 얼굴로 알았다 그래놓고 나중에 보면 하나도 안 해놨다? 왜 안 했냐고 물어보면 잊어버렸대."

  반전이었다. 웃는 얼굴로 대답한 후에 다 잊어버리는 남편과 사는 삶은 또 어떤 걸까? 해줄 건 다 해주면서 기분나쁘게 구는 남자와 사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철썩같이 믿고 있다가 뒤통수 맞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사람과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육아와 살림과 남편에 대해 성토하는 동안 말없이 듣기만 하던 C에게 물었다.

  "너는 어때? 남편이랑 잘 지내?"

  "응. 아직은 잘 지내. 오빠가 테니스 치러 나가는 횟수도 줄였고."

  C의 유일한 고민은 남편이 테니스를 너무 사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 5회 테니스를 치러 나가는 남편에게 C가 몇 번 크게 화를 낸 이후로 가정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했다.

  "나는 남편 잘 만난 것 같아. 내가 기분이 오락가락해서 난리쳐도 남편이 다 받아줘."

  남편 이야기를 하면서 C의 눈이 반달처럼 웃었다. 툭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남편과 사는 나는 이번엔 C가 부러웠다. 다 받아주는 남편이라니.


  하지만 C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나 최근에 또 유산했거든. 그 때도 오빠가 따뜻하게 품어줘서 잘 지나갔어."

   C가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알았지만 최근에 또 아이를 잃어버린 줄은 몰랐다. 육아가 힘들다며 징징거린 말들 중에 혹시 실수한 건 없을까. 쏟아낸 말들을 되짚어보고 있는데 C가 담담하게 말했다.

  "오빠는 아이 없어도 괜찮대. 생기면 너무 큰 기쁨이지만, 우리 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너는?"

  "나도 아이가 생기면 너무 감사하지만, 없어도 오빠랑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C는 아이가 생기면 누구보다 잘 키울, 정말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저런 마음이라면 C와 남편은 아이가 없 행복하게 잘 살 것 같았다. 아이가 없었으면 헤어졌을 지도 모를 큰 위기를 몇 번 겪어낸 나로서는 존경스러운 부부의 모습이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그 날의 모임에 대해 직장에서 이야기했다. 결혼 30년차 선배가 인생이 원래 그런거라고 했다.

  "내가 말이야, 남편을 진짜 사랑하거든? 내가 남편을 하도 찾아싸서 우리 딸이 놀려. 엄마는 아직도 아빠가 그렇게 좋냐고."

  조금 놀랐다. 자녀들이 다 자라서 시집도 갔는데, 이제 퇴직을 눈 앞에 뒀는데, 같이 산 지 30년이 다 되어서도 남편을 진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구나.

  "나는 우리 남편이 진짜 존경스럽고, 정말로 좋아. 그런데 지이이인짜로 나랑 안 맞아."

  "네에? 사랑하신다면서요."

  "응. 사랑은 해. 근데 드럽게 안 맞아."

  "그럼 많이 싸우세요?"

  "엄청 싸우지. 아직도 싸워."

  "그런데 선배님. 최근까지 시아버지랑 같이 살지 않으셨어요? 어디서 싸우셨어요?"

  "방문 닫고도 싸우고. 소리지르면서 싸우고 싶을 때는 운동장에서 만나자고 한 적도 있어."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었다. 진짜 사랑하지만 드럽게 안 맞아서 운동장에서 싸우는 50대의 부부를 상상하자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결혼 15년차 선배가 말했다.

  "저희는요. 거의 안 싸워요. 그런 거 보면 잘 맞는 거겠죠?"

  거의 쌈닭처럼 살고 있는 나는 이번엔 또 그 선배가 부러워졌다.

  "잘 맞으니까 안 싸우는 거 아니예요?"하고 묻자 15년차 선배가 "그런가..."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나는 남편을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냥 잘 맞으니까 사는 거지, 사랑해서 사는 거 같지는 않다?"


  한때 유행하던 밸런스게임이 생각났다. 카레맛 똥과 똥맛 카레 중에 당신은 무엇을 고를 것인가. 카레랑 김치만 있으면 일주일동안 밥을 먹을 있는 사람으로서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맛이 괜찮은 좋은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똥이 아니라 음식인 좋은 것인가. 부부관계의 밸런스 게임 역시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사랑하지만 맞는 사람과 사는 좋을까, 드럽게 맞지만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을까?


  집에 돌아와 남편 얼굴을 보자 선배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넷플릭스에서 뭘볼까 고르는 남편을 붙잡고 물었다.

  "자기는 똥맛 카레를 먹을 거야, 카레맛 똥을 먹을 거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남편은 "나 카레 안 좋아하잖아."하고 다시 넷플릭스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맞다. 나는 카레를 안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지... 하고 그의 말에 수긍하다 문득 깨달았다. 대화가 이딴 식으로 흘러간다는 건 안 맞는다는 증거인 것 같았다. 그러면 우리는 사랑하는가? 30년차 선배처럼 "진짜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또 안 사랑한다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 게 우리 부부였다.


  남편이 "자기는 뭘 선택할거야?"라고 물어주면 성의있게 대답한 후, 사랑하지만 잘 안 맞는 부부와 사랑하는지 모르겠지만 잘 맞는 부부 관계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과의 대화는 초장부터 길을 잃었다. 이래서 대화는 여자친구들이랑 해야하는건가. 카레를 싫어한다는 남편의 대답에 심술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서 그날 저녁 메뉴는 카레로 정했다. 나의 최애메뉴 중 하나이며 요리하는 사람에게 세상 만만한 메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식단에 카레를 자주 넣지 않았던 건 순전히 카레를 싫어하는 남편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리를 하는 사람이 난데! 언제까지 남편에게만 맞출 수는 없지 않은가! 혼자 카레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내 입맛대로 카레를 끓였다. 채소를 듬뿍 넣고, 약간 매콤하게.


  그 동안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던 남편이 일어나 청소기를 돌렸다. 알콩달콩 이야기를 나눠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밥 하는 아내를 두고 혼자 TV는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런 남편을 위해 냉동실에서 돈까스를 찾아 에어프라이어에 돌렸다. 남편은 카레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식카레집에서 돈까스와 함께 먹는 건 좋아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잘 꺼내지 않는 예쁜 접시에 돈까스를 담고, 그 위에 카레를 부어주자 남편이 "오~ 제대로 한 상 차렸는데?"하면서 좋아했다. 그럭저럭 사랑하고, 그럭저럭 맞는 남자와는 이렇게 살아가면 될 것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카페라떼와 배탈과 별과 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