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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Sep 30. 2022

카페라떼와 배탈과 별과 시

  저녁으로 부대찌개에 라면사리까지 넣어 든든하게 먹고 배를 두드리다가 산책을 나섰다. 날씨가 환상적이었다. 아직 여름의 끝자락인데도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하늘에는 별도 있었다. 유모차에 탄 딸에게 "별 봐라, 별!" 하자 남편이 "저거 다 인공위성이거든!" 했다. 등짝을 한대 때려주고 투닥거리며 산책로에 들어섰다. 바람을 쐬러 나온 신혼부부와 노부부와 어린아이들과 강아지가 잔뜩이었다. 지나가는 멍멍이들이 여기저기를 코로 헤집고 다니는 모습을 구경하며 느릿느릿 산책로를 걸었다.


  쾌한 날씨 덕분에 산책이 길어졌다. 나오기 직전에 딸이 큰볼일까지 보고 나왔으니 리까지 다녀와같았다. 횡단보도를 건너 남의 아파트 산책로로 들어섰다. 늦여름의 매미가 우렁차게 울어대고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을 때쯤, 불이 환하게 켜진 카페가 보였다. 유모차 타고 다니는 주제에 카페라면 환장하는 딸이 들어가자고 졸랐다. 딸에게 뽀로로 음료수를 하나 쥐어주고, 나는 아이스 카페라떼를 골랐다.  걷다가 마시는 아이스 카페라떼는 꿀맛이었다. "밤새 못 자려고 까분다. 그만 먹지?"하는 남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리고 커피를 쪽쪽 빨며 길을 걸었다. 그리고 정확히 15분 뒤, 나는 카페라떼를 마신 내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었다. 배가 부글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 배가 아픈데 어쩌지...?"하자 남편이 웃었다. 배가 아파서 허구헌날 리를 치르는 나를 지켜보는 게 이제 그에게도 일상이 된 것이다. 연애시절, 육개장을 먹고 탈이 나를 화장실에 데려다주기 위해 자유로를 130km/h 내달리던 남자는 이제 배아프다는 말에 콧방귀도 안 뀌는 사람이 되었다. 지만 사태 심각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배에서는 천둥이 쳤다. 차가운 카페인과 얼큰부대찌개가 장에서 만나 강술래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행복하던 산책길순식간에 지옥의 행군으로 바뀌었다. 물이 흐르고, 별이 빛나고, 바람이 선선한 완벽한 산책로에 단 하나 없는 게 바로 화장실이었기 때문이다. 하필 배가 아프기 시작한 곳이 카페와 집의 딱 중간이었다. 되돌아가는 것보다는 집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위기였다.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으며 한동안 멀리했던 하나님을 찾아댔다. 하나님, 제발 이 길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우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설 무렵, 고통의 주기는 심각하게 짧아져 있었다. 딸을 낳던 날, 이 정도 간격으로 배가 아팠을 때 분만실에 들어갔었지. 하지만 지금 내 뱃속에서 탈출하려는 건 딸이 아니으므로 딸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엄마, 어디 가!" 하는 딸을 뒤로 하고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속도 싸움이었다. 집까지 올라가기만 하면... 들어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가 17층에 멈춰있다. 슬픈 예감이 밀려왔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속도로 엘리베이터가 1층에 내려올 때까지는 심호흡을 하며 참았다. 하지만 우리 집은 8층이었고, 비밀번호 6자리와 *을 눌러야 현관문이 열렸고, 화장실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했다. 그렇게 나는 배탈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화장실에서 뒷수습을 하며 생각했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아이스 카페라떼를 고른 것? 산책을 너무 멀리 나간 것? 부대찌개에 사리까지 넣어 먹은 것? 어쩌면 이따위 장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문제일 지도 몰랐다. 모든 것을 후회하며 속옷을 빠는 동안, 남편이 딸을 데리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하고 묻던 남편은 내가 젖은 팬티를 들고 건조대로 가는 모습을 보더니 미친듯이 기 시작했다. 음엔 망해서 나도 같이 웃었다. 그런데 남편이 웃어도 너무 웃었다. 박수까지 쳐가면서. 서운한 마음이 차올랐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자기는 웃기만 하냐!"

  가 빽! 소리를 지르자 남편이 웃음을 멈추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어쩌면 나의 눈에는 눈물이 조금 고여있을지 모른다. 남편은 나를 쳐다보다가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아니, 그게, 나는... 귀여워서 그랬지..."


   앞머리를 훌렁 까고, 목 늘어진 티를 입은 채 추노꾼의 몰골로 돌아다니는 나이지만 그래도 남편 앞에서 똥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좋아하는 마음으로 만난 남자 아닌가. 서로의 코고는 소리와 앞사람이 볼일을 본 뜨뜻한 변기를 공유하며 결혼생활이 우아하지 않을 줄은 진즉에 알았다. 하지만 이건... 이건 좀 아닌것 같았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있는데 또 배가 아파왔다. "아이씨..." 화장실로 향하는 나를 보며 남편이 "또 가? 괜찮냐?"했다. 걱정하는 표정이었지만 분명 눈이 웃고 있었다. 그날 밤,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저녁에 마신 커피 때문인지 수치심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는 산책을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내가 또 아이스 카페라떼를 마시면 사람이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어서 그 때의 기억은 다 잊고, 여전히 똑같은 산책로로 산책을 잘도 다닌다. 다만 이제는 절대 산책로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에도 카페라떼를 마실 때, 가까이에 화장실이 있는지 꼭 확인한다. 얼마 남아있지 않은 아내로서의 품위와 자존심 지키려면 그 방법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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